[이범의 불편한 진실] 한국 교육을 혼란케 한 미국 교육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2022. 5. 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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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 스펙이 논란이 되면서, 과거 나경원 전 의원의 자녀에 이어 미국 대입제도가 다시 입길에 올랐다. 수사라도 이뤄지지 않는 한 구체적인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식 입학사정관제 특유의 광범위한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허술하고 악용되기 쉬운 제도가 왜 오랫동안 한국 교육의 지향점인 것처럼 여겨졌을까? 보수와 진보가 모두 미국발 교육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개인’이 외면되고 ‘시험’이 폄하되었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개인’은 어떻게 외면되었는가? 서구 선진국은 고전적 자유주의가 토대로 깔려 있는 나라들이고, 그만큼 개인이 누리는 권리의 폭이 넓다. 교사는 교재·수업·평가와 관련하여 상당한 자율권을, 학생은 교과목·교육과정 선택과 관련하여 상당한 자율권을 가진다. 한국에서 이제 겨우 할 듯 말 듯한 고교학점제가 오래전부터 기본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전제 위에 학교의 자율권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왔다(사립학교·차터스쿨·마그넷스쿨 등). 대입과 관련해서도 연방대법원까지 간 소송이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자율권’을 논거로 삼은 대학 측이 승소했다. 즉 미국에서 ‘개인’의 자율은 암묵적 전제로 깔려 있고, 여기에 덧붙어 ‘학교’의 자율이 주로 담론화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암묵지(暗默知)인 ‘개인의 자율’은 한국으로 수입되지 않았다. 지적 식민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발표된 5·31 교육개혁안의 대표 슬로건이 ‘자율’이었는데,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고등학교(자사고)나 대학 자율에 입각한 대입제도를 핵심으로 담고 있는 반면 교사나 학생의 자율은 도외시되었다. 진보교육계의 대안이 개인에게 자율을 부여하는 새로운 제도적 플랫폼이 아니라 혁신 ‘학교’의 일반화라는 다소 황당한 목표(공모제 사업이 어떻게 일반화 가능하단 말인가?)로 빠져버린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만일 윤석열 정부가 자사고·외고·국제고를 유지함과 동시에 고교학점제를 폐기한다면, 거의 30년간 지속된 ‘학교의 자율을 중시하고 개인의 자율을 외면하는’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는 셈이 될 것이다.

팩트체크를 해보면 보수와 진보의 합작이 드러난다. 보수 집권기에 특목고가 만들어지고(전두환 정부) 자사고가 급증했으며(이명박 정부), 진보 집권기에 자사고가 만들어지고(김대중 정부 전국자사고 인가) 특목고가 급증했다(노무현 정부 외고 11개, 과학고 3개 인가). 김영삼 정부 마지막해 시작된 수시전형은 2020학년도까지 계속 증가했고 도중에 미국식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마지막해 10개 대학 254명을 시범적으로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했는데, 이명박 정부는 ‘대입 자율화’를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 입학사정관제에 박차를 가했고 이를 위해 대학들에 나눠주기 시작한 돈이 집권 마지막해 391억원에 달했다.

‘시험’은 어떻게 폄하되었는가? 학력보다 잠재력과 다양한 역량이 중요하며, 따라서 시험점수 이외의 다양한 활동기록을 활용하여 선발해야 한다는 것은 한 세기 전 미국에서 입학사정관제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된 클리셰다. 그런데 이러한 독특한 선발방식이 당시 아이비리그를 점령할 기세로 몰려들던 유대계 이민자들을 제한하고 주류 백인 개신교도(WASP)의 비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사회학자 제롬 카라벨의 <누가 선발되는가>(The Chosen·2005년) 이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인종차별이라기보다, 기부금을 많이 낼 만한 가문들과 결탁하여 대학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미국 사립대 운영모델의 논리적 귀결에 가깝다.

진보진영도 ‘점수 위주로 줄세우는’ 선발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심지어 이를 통해 대입경쟁이 완화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대학서열화와 학생서열화(성적순 선발)는 전혀 다른 범주이고, 성적순 선발이 교육적으로 해롭다는 근거도 없다. 대표적인 반례가 핀란드다. 핀란드 대학에서는 예를 들어 어떤 학과의 정원이 70명인데 150명이 지원했다면, 대입시험 성적만으로 줄세워서 70등에서 자른다. 심지어 내신성적도 반영하지 않는다.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대입 경쟁이 한국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은 직업교육이 충실하고 대학이 평준화(‘수준이 고르다’는 의미에서)되어 있기 때문이지, 시험이 아닌 다른 묘수를 찾아내서가 아니다. 대입 선발에 할당제나 소수자 배려제도(affirmative action)를 시행하는 나라도 없다. 현재 한국에서 시험과 능력주의를 놓고 벌어지는 논란도 다분히 미국스러운 풍경인 것이다.

이범 교육평론가·<문재인 이후의 교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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