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가 "너무 우울하다"며 틀어주지 않은 노래.. 역주행 신화 일궈낸 비결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배순탁의 비사이드 진행자 2022. 5.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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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배순탁의 당신이 몰랐던 팝]
라디오헤드의 명곡 '크립'
멤버들이 싫어한 이유
영국 록 그룹 ‘라디오헤드’의 최고 히트곡 ‘크립’은 리드 보컬 톰 요크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10대 시절 요크는 눈꺼풀 장애라는 외모 콤플렉스와 내성적 성격 때문에 짝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유튜브

그럴 때가 있다. 모두가 열광하는 가운데 왠지 나 혼자만 시큰둥해지는 순간. 힙스터 병 걸린 거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분명히, 그것도 다량으로 널려있는데 왜 찾으려 하지 않는 건지를 궁금해할 뿐이다.

라디오헤드의 ‘크립(Creep)’, 모르는 사람 거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팝에 관심 없어도 알고 있을 음악 목록을 꼽는다면 최상위권에 등재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노래다. 결론부터 말한다. 나는 (제법 소문난) 라디오헤드 팬이다. 그들의 디스코그래피를 한정판 포함해 거의 전부 소장하고 있다. 한데 라디오헤드의 수많은 명곡 중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노래가 딱 하나 있다. 바로 ‘크립’이다.

나는 ‘크립’이 라디오헤드의 가장 훌륭한 노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만약 라디오헤드를 어느 정도 꿰고 있는 팬이라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다만 ‘크립’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 있어서 압도적인 지위를 선점한다. 이것만큼은 나도 부정할 수가 없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록 음악 딱 1개만 정하라고 한다면 너바나의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의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 노래는 2개 정도뿐이다. 오아시스(Oasis)의 ‘돈 룩 백 인 앵거(Don’t Look Back in Anger)’와 바로 이 곡 ‘크립’이다.

라디오헤드를 브릿팝(Brit Pop) 밴드로 분류하는 기사를 가끔 본다. 엄밀히 말해 틀렸다. 요약하면 ‘크립’은 영국 아닌 미국, 즉 강렬한 그런지/얼터너티브의 잔향이 짙게 묻어난 곡이다. “지직”하면서 청각에 수직으로 내리꽂듯 연주되는 디스토션 기타부터가 그런지의 그것과 꼭 닮아있다. 한데 이 연주, “곡이 너무 소심하다”고 여긴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가 이를 참지 못한 나머지 ‘사보타주’한 결과라고 한다. 일단 저지르고 봤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히게 어울려서 살리기로 한 것이다.

‘크립’이 싱글로 세상에 던져진 해는 정확히 1992년 9월 21일이었다. 브릿팝의 첫 번째 절정이라 할 오아시스의 1집이 나오려면 아직 2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또 다른 브릿팝 거물 블러는 1991년 데뷔작으로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대세를 뒤집을 수준은 아니었다. 기대와는 달리 ‘크립’의 영국 차트 순위는 형편없었다. 78위, 누가 봐도 초라한 성적표였다. 심지어 이 곡은 “너무 우울하다”는 이유로 BBC 라디오 선곡표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진짜다.

흥미롭게도 곡을 구원해준 건 지향이 더욱 잘 들어맞는 미국이었다. ‘크립’은 빌보드 싱글 차트 34위, 모던 록 차트에서는 무려 2위까지 올랐다. 미국에서의 성취가 영국까지 전해지면서 ‘크립’은 1992년 재발매를 통해 영국 차트 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역주행 신화를 일궈낸 셈이다.

‘크립’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살금살금 움직이다’ ‘살살 기다’ 등 뜻이 여럿임을 알 수 있다. 이 곡에서 노래하는 ‘크립’은 그중 “소름 끼치게 싫은 놈”이라고 볼 수 있다. 세 글자로 줄이면 ‘지질이’쯤 될 것이다. 대강의 노랫말은 이렇다.

“넌 천사 같아/ 네 피부는 날 울게 만들지/ 넌 아름다운 세상에서 깃털처럼 떠다니지/ 난 내가 특별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네가 정말 특별하니까/ 하지만 난 지질한 놈이야/ 괴짜일 뿐이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야”.

톰 요크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10대 시절 짝사랑에 빠졌지만 내성적인 성격,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다가설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톰 요크는 눈꺼풀에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 그의 눈을 두고 “도롱뇽 같다”며 놀린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한창 예민했던 그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몇 가지 오해가 있다. 먼저 ‘크립’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탓에 라디오헤드가 공연 때 절대 부르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많다. 꼭 그렇지는 않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은 부른다. 부르지 않았던 기간이 있기는 있었다. 한때 톰 요크는 ‘크립’을 “쓰레기(crap) 같은 곡”이라면서 경멸하기까지 했다.

상황이 변한 건 2000년대 중반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심지어 한 공연에서는 “이 곡 꽤 좋아해요”라면서 ‘크립’을 노래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톰 요크와 멤버들의 심정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다음처럼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자기 운명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자신감은 자연스럽게 커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사고와 행동에 여유로움이 깃든다고 할까. 그들이 ‘크립’을 다시 품게 된 이유 역시 이와 무관치 않을 터다. 과연, 이어령 선생의 표현대로 상처와 활이 하나가 되는 순간 새로운 지평은 열리는 법이리라.

기실 라디오헤드가 ‘절대’ 부르지 않는 노래는 따로 있다. 어쩌면 한국에서 ‘크립’ 다음으로 인기 있는 곡이라 할 ‘하이&드라이(High&Dry)’다. 라디오헤드는 녹음까지 다 마쳤지만 “너무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 같고, 나쁜 노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로드 스튜어트는 대체 무슨 죄인지 모르겠지만.

싱글 발매를 꺼렸음에도 곡의 상업적 가능성을 포착한 소속사는 강제로 일을 진행시켰다. 과거에도 라디오헤드 멤버들은 ‘크립’의 영국 재발매를 결사반대했던 적이 있었다. 이 불쾌한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어 이후 라디오헤드가 완전히 새로운 판로를 모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레코드 회사의 간섭에서 벗어나 팬들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만큼 지불하고 직접 다운로드하는 형식으로 7집 ‘In Rainbows’(2007)를 발매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음반 하나로 얻은 디지털 수익이 기왕의 디지털 수익 전체를 훌쩍 뛰어넘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라디오헤드니까 가능했던 거다”는 비판적인 시선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수많은 인디 뮤지션·밴드가 레코드 회사의 간섭 없이 유튜브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홍보하는 흐름에 시금석을 마련해줬다. 이렇듯 라디오헤드는 음악만이 아닌 산업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혁신의 기틀을 닦아준 존재였다. 그들이 여러모로 위대한 밴드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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