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디가 킥보드 됐다" 패닉에 빠진 '김치 코인' 투자자들

박건 2022. 5. 14.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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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 모습. 한국산 가상화폐 루나와 자매 스테이블 코인 테라 USD(UST) 폭락으로 가상화폐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연합뉴스]
“아우디R8 탈 돈이 킥보드 됐다는 거잖아.”

지난 12일 한 암호화폐 투자 유튜버의 실시간 방송 중 달린 댓글 내용이다. 이 유튜버는 국산 암호화폐인 루나에 약 2억 6000만원을 투자했으나, 가격이 폭락하면서 가치가 45만원까지 떨어진 모습을 중계했다. 고급 스포츠카를 살 수 있는 돈이 불과 며칠 사이에 킥보드 가격 수준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루나가 상장폐지 수순까지 밟으면서 투자자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는 13일(한국시간 기준) 루나의 일부 현물 거래와 모든 선물 거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국내 암호화폐 거래의 80% 가량을 차지하는 업비트 역시 오는 20일 12시부터 루나 거래 지원을 종료한다고 이날 발표했다. 연일 가격 하락이 이어지면서 가치가 99% 이상 떨어지는 상황에 이르자 사실상 상장폐지 조처를 내린 것이다. 가치 연동 과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고, 후속 대응 조치에 유의미한 진척이 없어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다. 루나를 유의 종목으로 지정한 다른 국내 거래소들도 상장 폐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루나의 가격은 이날 오후 6시 기준 0.00004달러(0.05원)까지 떨어졌다. 24시간 만에 가치가 2만5000분의 1로 급락한 것이다. 지난달 119달러(약 15만원) 선에서 거래되며 시가총액 400억 달러(51조원, 전세계 코인 시가총액 8위)까지 올랐던 루나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된 셈이다. 루나와 테라는 애플 엔지니어 출신인 권도형 대표 등이 설립한 ‘테라폼랩스’가 발행한 코인이다. 본사는 싱가포르에 있지만 한국인이 만들어 ‘김치 코인’이란 별명이 있다.

한 달 사이에 루나 가격이 사실상 ‘휴짓조각’이 되자 투자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이날 암호화폐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루나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봤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연이어 올라왔다. 한 네티즌은 “친구가 ‘마통(마이너스통장) 뚫어서 1억원을 넣었는데 완전히 박살 났다’고 울면서 전화했다”며 “원금 회복 가능성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루나의 발행사인 테라폼랩스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투자자도 적지 않았다. 서울 성동경찰서는 이날 테라폼랩스 권도형 대표 자택을 무단으로 침입한 남성이 도주 후 자수했다고 밝혔다. 암호화폐 관련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이 남성은 전날 오후 6시쯤 권 대표의 아내가 사는 아파트 공용 현관으로 몰래 들어와 초인종을 눌러 “남편이 집에 있느냐”고 물어본 뒤 달아난 것으로 확인됐다. 투자 손실을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예고하는 글이 연달아 올라오자 ‘경찰이 주말 사이 마포대교 순찰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온라인에서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 관계자는 “관련 지시를 내린 적 없다”고 일축했다.

루나는 자매 코인인 테라와 짝을 이룬다. 테라는 가격이 1달러에 고정되도록 설계된 스테이블 코인이다. 루나의 공급량과 연동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가치를 유지해왔다. 테라 가격이 떨어지면, 루나를 발행해 테라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1달러에 맞춘다. 루나에 대한 투자가 이어져야 테라 가치가 유지되는 구조 탓에 ‘다단계 금융사기’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루나 시세가 오르는 동안에는 잘 굴러가는 듯 보였다. 문제는 암호화폐 시장이 약세를 보이며 테라 값이 1달러 아래로 떨어지며 시작됐다. 테라의 가치 복원을 위해 루나의 발행을 늘리자 루나 값이 더욱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7억2000만개 수준이던 루나 발행량은 13일 현재 3조개를 넘어섰고, 신뢰가 흔들리자 투자 자금이 급속히 빠지는 ‘뱅크런’이 일어났다.

루나의 추락은 연일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는 세계 암호화폐 시장에도 여파를 미칠 전망이다. 전체 암호화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트코인 가격은 최근 3만 달러(약 3800만원)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6만 달러(약 7700만원)대까지 가격이 치솟았던 것과 비교하면 반 토막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암호화폐 전체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2000억달러(약 260조원) 이상 감소한 것으로 추산했다. 시장에 악재가 이어지자 암호화폐 투자자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특히 적극적 투자성향을 가진 2030 세대가 김치 코인에 몰리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번 사태로 손실을 본 일부 투자자들의 무리한 투자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일각에서 나온다. 암호화폐 개인 투자자인 박모(38)씨는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안정성이 떨어지는 김치 코인에 돈을 몰아넣는 건 금기로 통한다”고 말했다. 블룸버그 등 외신도 현금이나 국채 같은 안전자산 대신 암호화폐를 담보로 코인을 발행하는 테라폼랩스의 사업 구조를 비판한 바 있다.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코인 발행사의 자격 요건 등을 일정 부분 규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건 기자 park.k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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