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도시의 고독한 올빼미족, 팬데믹 시대 가장 많이 소환
에드워드 호퍼 ‘나이트호크’
그림에는 텅 빈 밤거리를 밝히는 다이너(diner), 우리나라로 치면 24시간 분식집 겸 커피숍인 저렴한 미국식 식당이 등장한다. 이 다이너는 벽에 걸쳐 이어진 통유리창 때문에 빛을 담은 거대한 수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빛과 노란 안벽의 따스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앉아 각자 커피잔을 앞에 놓은 올빼미족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대화할 거리가 별로 없는 듯한 남녀, 그들과 동떨어져 홀로 앉아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듯한 남자, 늘 하던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있는 듯한 식당 직원….그래서 이 그림은 대도시의 고독과 무심함과 소통 단절의 시각적 대명사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 그림을 달리 보이게 만들었다. 여러 나라에서 록다운 기간에 음식점·커피숍·바가 전부 닫히고 테이크아웃만 허용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영업시간이 제한되면서, 깊은 밤 환히 불 밝힌 카페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 자체가, 그들이 대화가 없건 말건, 애틋하게 그립고 닿을 수 없는 온기를 품은 장면이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나이트호크’의 패러디가 쏟아져 나왔는데 다이너 안이 텅 비고 불이 꺼져있거나, 다이너가 아예 폐업해서 싹 비워진 모습이거나 셔터가 내려져 있는 버전도 있다. 이들의 섬뜩할 정도로 스산한 쓸쓸함은 원작 ‘나이트호크’의 고독감과 비할 바가 아니다.
호퍼 “무의식적으로 대도시 쓸쓸함 그려”
‘나이트호크’의 다이너를 비롯해서 그의 그림에는 카페, 호텔, 기차역, 기차 객실, 도로, 주유소 등등 이동을 위한 공간이나 여행 중에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 많이 나온다.(그림4) 이런 곳에서 홀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낯선 이들과의 소통의 가능성을 살짝 품은, 그러나 스스로 거리를 두는, 감미롭고 씁쓸한 대도시의 고독감이다. 팬데믹이 절정일 때 강제 격리와 봉쇄로 쓰디쓴 고립과 침체를 느낀 도시인들은 이 달콤쌉싸름한 고독감을 그리워했다.
작가인 호퍼 자신은 인터뷰에서 가장 아끼는 자신의 작품 중 하나로 ‘나이트호크’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길이 만나는 곳에 있는 (뉴욕) 그리니치 애비뉴의 식당을 모델로 했어요. 밤거리라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이 구현된 게 나이트호크 같습니다… 밤거리가 특별히 쓸쓸하다고 보진 않았어요. 나는 장면을 상당히 단순화하고, 식당은 (실물보다) 더 크게 그렸습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대도시의 쓸쓸함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긴 합니다.”
평론가들은 당시에 태동하던 필름 누아르의 분위기가 이 그림에 스며 있다고 본다. 대도시의 무심함에 방치된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범죄 사건, 그에 연루된 비관적이고 고독한 탐정이나 청부업자, 그리고 좌절된 로맨스가 등장하는 영화들 말이다. 실제로 호퍼는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나이트호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단편소설 ‘살인자들(살인청부업자들)’(1927)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그런 호퍼의 그림이 다시 누아르 영화들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살인자들’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1946)에는 ‘나이트호크’와 무척 닮은 다이너 장면이 나온다. 이 그림은 그 밖에도 많은 영화들에 영감을 주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네오 누아르’라고 불리는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1982)다. 이 영화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은 제작진 앞에 ‘나이트호크’ 그림 복사본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림 속 여성 대부분은 부인이 모델
이런 그림을 그린 호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뉴욕 근교 마을의 잡화점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여 뉴욕의 상업미술학교에 들어갔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순수미술을 가르치는 뉴욕예술학교(디자인 명문대학 파슨스의 전신)로 옮겼고, 일러스트레이션 알바를 열심히 뛰어 유학비를 마련해 프랑스 파리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호퍼가 극적인 전환기를 맞은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항구 도시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해변가 집들을 수채화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마침 거기에서 오랜만에 만난 뉴욕예술학교 동창 조세핀 니비슨(1883-1968)의 격려를 받고 그 수채화들을 화랑에 내놓아 완판된 것이다. 용기를 얻은 호퍼는 드디어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매우 낭만적이고 모범적인 부부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호퍼는 조의 신여성다운 독립적인 모습과 화가로서의 안목에 반해서 결혼했으면서도 일단 결혼한 후에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부부 역할을 원했고 조는 당연히 거기에 저항했다. 둘의 관계는 곧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였다. 호퍼는 2m 가까운 키에 돌덩어리처럼 느리고 과묵했고, 조는 152㎝ 키에 새처럼 재빠르고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성격이었다. 조는 남편과 대화하는 게 “그냥 우물에 돌을 던지는 것 같아. 차이점이라면 우물에 던진 돌과 달리 쿵 소리도 안 난다는 거지”라고 불평했고, 호퍼는 “여자 하나와 사는 건 호랑이 두세 마리와 사는 것과 맞먹어”라고 투덜거렸다. ‘나이트호크’에서 조를 모델로 그린 여자 옆에 앉은 남자와 등을 돌리고 앉은 남자는 모두 호퍼 자신을 모델로 그린 것인데, 이쯤 되면 왜 그림 속 그들이 서로 대화가 없는지 알 것도 같다.
그럼에도 이 부부는 호퍼가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함께했다. 그보다 1년 앞서 호퍼는 죽음을 예감하고 최후의 그림 ‘두 희극배우’(1965)를 그렸는데(그림2), 광대 복장을 한 자신과 아내 조가 손을 맞잡고 무대에서 고별인사를 하는 모습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였고 함께 걸어온 인생은 비극보다 희극이었나 보다. 호퍼가 떠난 후 충격과 우울에 빠진 조 역시 불과 열 달 후 세상을 떠났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미술전문기자. 서울대 경제학부 학·석사, 런던대 골드스미스컬리지 문화학 석사, 홍익대 예술학과 박사 과정 중. 저서로 『그림 속 경제학』(2014), 『명화독서』(2018), 『광대하고 게으르게』(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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