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앞서 전쟁의 문을 닫고 또 열었던..혜안의 아테네 전략가[윤비의 칼과 펜](2)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2. 5. 13.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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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

[경향신문]

페리클레스는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룩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다. 키몬의 귀족파에 맞서 민중파를 이끄는 지도자였고, 키몬 사후 아테네 정치를 지배했다. 바티칸 박물관
델로스 동맹 맹주가 된 아테네
강한 해군 앞세워 동지중해 공략
눈독 들이던 페르시아 요지 침공
결과는 참패하며 역공 위기에
스파르타와 대립 속 내부도 동요

■페리클레스. 아테네의 전략가

기원전 495년에 태어나고 기원전 429년에 죽었다. 키몬이 이끄는 귀족파에 맞서 민중파를 이끌었고 키몬을 밀어낸 후에는 30년간 아테네 정치를 지배했다. 아테네가 기원전 460년부터 벌이던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15년 만에 마무리 지었고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후 이번에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설득하여 아테네를 전쟁으로 이끌었다. 페리클레스 이야기이다.

그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영웅이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페리클레스가 전몰장병에 바친 추도 연설을 기록하고 있다. 연설에서 페리클레스는 애국심의 가치와 더불어 누구도 신분이나 재산의 차이 때문에 사적인 문제에서건 공적인 업무에서건 차별받지 않으며 오로지 법에만 복종하고 법 앞에 평등한 체제로 아테네를 찬양한다. 이 기록이 페리클레스의 생각을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더불어 페리클레스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밝은 면만을 부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이 연설은 아테네 민주주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서 쉼 없이 읽히고 토론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사실은 페리클레스가 매우 뛰어난 전략가였다는 점이다. 투키디데스는 민주주의의 지도자로서보다 전략가로서 페리클레스를 높이 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패배가 그의 사후 그에 필적할 만큼 명민한 지도자를 더 이상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정치가 페리클레스

페리클레스는 민중파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특권의 타파를 이끈 지도자들이 흔히 그렇듯 그 자신은 재산과 배움의 기회가 있는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기원전 461년 친(親)스파르타파 정치인이며 귀족파의 지도자 키몬이 시민들의 투표로 아테네에서 쫓겨났다. 그 뒤에 페리클레스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키몬은 대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으로서 스파르타와 힘을 합해 페르시아를 계속 몰아붙여야 한다고 여겼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같은 수레에 매인 두 마리의 말로 비유했다고 전한다.

투키디데스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격퇴한 후부터 이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이 예견되어 있었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묘사한 것이다. 기원전 460년 스파르타와 첫 충돌이 일어나기 이전,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타를 견제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스파르타와의 갈등이 분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텟살리아, 아르고스, 메가라와의 동맹도 스파르타의 주의와 힘을 분산시키고 만일의 경우 육군의 진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기원전 460년 전후 아테네의 주요 관심은 사실 동지중해에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래 델로스 동맹의 리더로서 거듭 승리를 이끌며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해군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엄청난 부가 축적되고 오가는 동지중해에서 그 해군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동지중해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벽지에 가까운 그리스를 두고 최강 육군을 지닌 스파르타와 대결하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기회는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찾아왔다. 이미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군대는 동지중해의 전략적 요지로서 페르시아 해군의 주요 기지가 있는 키프로스를 공략 중이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200척의 삼단노선, 약 4만의 군대(그 가운데 아테네 군은 약 2만 정도였다)가 이집트를 향했다. 그리고 6년 후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아테네와 동맹은 동지중해에서 물러났다. 상당한 수의 배와 병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이제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역공을 두려워해야 할 상황이 펼쳐졌다. 아테네의 지도력이 흔들리고 동맹국의 동요가 가시화되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아테네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위기 속의 전략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희생자들의 장례식에서 연설하는 페리클레스. 필립 폰 폴츠
‘두 개의 전쟁에 말려들 땐 파멸’
모든 원정군대 물리고 평화 택해
15년간 계산된 ‘평화 속 성장’
사모스섬에서 반란 기류
스파르타·페르시아 개입 움직임에
즉각 맹공 결정하고 조기 진압
BC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불가피한 순간’ 전략적 결단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스파르타와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아테네에는 대략 두 파벌이 대립했다. 하나는 앞서 본 키몬처럼 스파르타와 연합하여 페르시아를 밀어내야 한다고 본 사람들이다. 이런 입장은 아테네인들 사이에서 꽤 지지를 얻고 있었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역시 이런 입장에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페리클레스가 원래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패배하고 스파르타와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했다. 그는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를 상대로 양면전을 벌여서는 아테네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스파르타건 페르시아건 한쪽과의 분쟁이 길어지면 다른 한편이 전쟁에 개입할 기회가 생기고 결국 아테네는 양면전에 말려들게 된다는 점도 이해했다. 결론은 평화였다.

페르시아군에 압도되어 이집트에서 물러난 지 3년여 만에 아테네는 동맹국들과 더불어 다시 한번 키프로스로 200척의 삼단노선을 동원한 대규모 원정을 조직한다. 그중 70척은 여전히 반란의 불씨가 꺼지지 않던 이집트로 향한다. 얼핏 실패한 이집트 원정을 재개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원된 군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이때 이미 아테네는 이집트를 지배하려는 생각은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군의 목표는 키프로스에 교두보를 마련하여 레반트에서 에게해로 기동하는 페르시아 해군을 감시하고 저지하는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마 키티온 포위전에서 키몬이 사망한 후 곧바로 원정군에 철수명령이 내려진다. 이즈음 아테네 정치를 지배하던 페리클레스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키몬이 사망한 후 아테네는 동지중해에서 어떤 군사작전도 벌이지 않다가 약 2년 후에는 에게해 지배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페르시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동지중해에서 완전히 물러선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스파르타와도 30년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로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생하는 약 15년간 아테네는 중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를 자극할 어떤 군사작전도 벌이지 않는다. 아테네는 평화 속의 성장으로 전략을 바꾼 듯 보였다.

물론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타와의 평화가 영구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그는 빠르고 단호하였다. 기원전 441년 사모스섬에서 아테네의 지배에 대항한 큰 반란이 일어났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아테네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스파르타에서 비등했다. 만일 코린토스가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스파르타는 동맹국과 힘을 합해 아테네로 밀고 들어갔을 것이다. 페르시아 역시 반란군을 원조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파르타가 개입한다면 페르시아도 그 뒤를 따를 공산이 컸다. 위기가 침략을 부르고 그 침략이 다음 침략을 부르는 치명적인 전략적 논리가 작동하려는 순간이었다.

페리클레스는 신속하게 결단했다. 그는 사모스로 함대를 파견하였다. 함대의 일부는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소아시아 해안으로 향했다. 예상되는 페르시아군의 개입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었다. 한편 사모스에 상륙한 아테네군은 일부 아테네 시민들이 고개를 돌릴 만큼 반란군을 심하게 다루었다. 페리클레스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사모스 반란이 아테네 지배 전체의 위기로 번지기 전에 완전히 꺼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클레스는 클레온 일파처럼 스파르타와 하루라도 빨리 사생결단을 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의 불가피성이 지금 전쟁을 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이해했으며 불필요한 대결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키프로스 라르나카 해변에 있는 키몬의 흉상.

■현명한 전략가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스파르타의 육군에 겁을 먹은 아테네인들에게 얼마나 열정적으로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아마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그는 결코 섣부른 팽창주의자가 아니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설득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페리클레스는 거듭하여 이 전쟁을 이용해 아테네의 지배를 확장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하여 경고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의 패배를 돌아보면서, 페리클레스가 아테네가 스파르타와만 싸운다면 전쟁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이것이 옳았다고 회고했다. 페리클레스가 양면전의 위험을 여전히 경계했고 전쟁의 여파를 가급적 최소화하고자 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는 스파르타 육군과의 교전을 가급적 피하고, 해군력으로 스파르타의 배후를 교란하면서 보급선을 차단하는 전술을 제안했다. 스파르타의 소모를 최대화하고 아테네의 전력손실은 최소화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의 개입 여지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를 휩쓴 역병에 희생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페리클레스의 뒤를 이은 아테네의 지도자들이 그만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아테네 몰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실력자이자 청렴결백으로 유명했기에 대중을 마음대로 주물렀으며, 대중이 그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들을 인도했다. (…)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후계자들은 수준이 그만그만했으며, 서로 1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국가 정책조차 민중의 기분에 맡겼다.”

투키디데스는 클레온이나 알키비아데스 같은 매파들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썼다. 그는 이들을 스파르타에 대한 경쟁의식과 적대감을 부추기고 아테네의 패권을 부르짖는 팽창주의자들로 그렸다. 이런 묘사가 모두 사실은 아니라 해도 이들 정치가들의 주장이 당시 그리스 세계를 아우르는 동지중해의 전체 세력판도에서 다분히 근시안적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리더의 책임

그리스 민주주의 영웅이자
뛰어난 ‘국제 전략가’
그를 잃은 후 아테네는 쇠락했다

오늘날 페리클레스에 대한 평가는 선동가에서 충실한 민주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다양하다. 그의 정치적 지향성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우리가 민주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 비해 국제 전략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많이 가려져 있다. 대규모 전쟁에 반복하여 시달리며 국가 이기주의에 유난히 예민해진 것도 여기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전쟁을 부르는 험한 시기에 페리클레스의 머리를 지배했던 것은 아테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문제였다. 그는 그와 관련하여 동시대 아테네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상황을 넓게 그리고 멀리 볼 수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의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정치가들이 사람들이 갖는 적대감이나 호의에 무책임하게 편승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민들을 합리적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정치지도자의 중요한 책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페리클레스의 이름을 자신의 역사책에 남겼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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