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에 눕고 싶지 않다".. 러軍, 전투명령 거부 가능한 이유는

이철민 선임기자 2022. 5. 1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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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론 '전쟁' 아닌 '작전'..엄격한 전시(戰時) 군법 적용 못하고'해임' 조치
러 인권 변호사들 "전시 아니라, 명령 거부해도 기소도 안 된다" 조언

지난 10일 미 국방부의 한 관리는 워싱턴 포스트에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에 투입된 러시아 군인들이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신속하게 수행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명령 수행을 거부하는 직위는 다양한 중간급 장교로, 대대 지휘관급까지 올라간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투입을 거부한 직업 군인의 병역수첩에 찍히는 스탬프. "반역, 거짓말, 허위 성향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스탬프가 찍히면, 제대 후 취업과 대학 진학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한다./라디오프리유럽 방송 웹사이트

그런가 하면, 영국 가디언은 12일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하는 육군 최정예 여단 소속 군인 9명이 4월초 또다시 우크라이나 배치를 명령받자 이를 거부했고, 결국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에서 가까운 러시아 남부 도시 벨고로드의 후방 기지에 배속됐다”고 보도했다.

이 중 한 명이었던 ‘드미트리’라는 가명의 러시아 군인은 가디언에 “2월말 벨라루스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투에 투입됐으며, 나는 관(棺)에 뉘지 않고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어떻게 전쟁 중인 러시아군에서 이런 일이 속출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우크라이나 침공이 러시아에선 아직 ‘전쟁(war)’이 아니고 공식적으로는 ‘특별군사작전(operation)’이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 매체는 79일째 이어지면서 러시아군 1만5000명(영국 정부 추정)이 죽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여전히 ‘작전’이라고 부른다. ‘전시(戰時)’가 아니니, 작전을 거부한 군인에게 해임 등의 조치 외에 더 엄중하게 처벌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2차 투입을 거부했던 ‘드미트리’는 가디언에 “나는 5년간 근무했고, 6월이면 제대다. 부끄러울 것도 없으며, 지금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니어서 지휘관들도 격노했지만 내게 강요할 수단이 없어 스스로 분을 삭였다”고 말했다.

지난달 중순에도 흑해 연안의 크림 반도에서 훈련 중이던 푸틴 직속의 국가근위대(National Guard) 대원 12명이 우크라이나 전쟁 투입 명령을 거부해 결국 해임됐다. 이들은 현재 고향에서 해임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이들을 변호했던 러시아인 변호사인 미하일 베냐시는 “우크라이나 전장 투입을 반대하는 군인들의 문의가 수백 건에 달한다”고 말했다.

베냐시는 “정부가 전면적으로 전쟁을 선언하면 군법상 군인이 전투를 거부하기가 힘들어지지만, 현 상황에선 우크라이나 전투를 거부해도 기소되지 않는다”며 “문의하는 군인들에게 ‘거부하라’로 조언한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또 러시아의 인권 단체인 ‘아고라’의 변호사인 파벨 치코프는 지난달 16일 라디오프리유럽 방송에 “7개 지역 이상의 국가근위대 1000명 이상의 병력이 우크라이나 전장 투입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이런 불복종 사태는 모두 푸틴이 정치적 부담을 고려해, ‘전쟁’ 선포를 하지 않은 정치적 결정에서 비롯됐다. 민간인 신분인 국가근위대원의 경우엔, 민간인이 여권도 없이 어떻게 외국 땅에서 ‘특수 작전’에 동원되느냐고 반발할 수 있게 됐다.

지난 5일 푸틴의 직할 부대인 러시아 연방 국가근위대원들이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서 러시아군의 상징이 된 대형 Z자 밑을 지나며 행진하고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근위대원들은 자신들이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에 투입된 것에 불만을 갖고 있다고 한다./AP 연합뉴스

그렇다고, 푸틴으로선 갑자기 ‘전쟁’을 선포하기도 쉽지 않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어용 매체들의 선전을 믿으며 ‘러시아 땅(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특별 작전’을 지지하지만, 이미 경제적 타격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전쟁’에 돌입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이런 식으로 우크라이나 투입을 거부한 러시아 군인의 수는 알 수 없다. 러시아의 군(軍)인권 관련 NGO의 변호사인 루슬란 레비예프는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돌아온 직업 군인의 20~40%가 재투입 명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러시아 전투 보병이 심각하게 부족한 원인에는 이런 이유도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영국 포린폴리시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인 군사분석가 롭 리는 가디언에 “푸틴이 전투 보병 부족을 타개하려면, 앞으로 수 주 내에 동원령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직업 군인들로만 계속 순환 배치하기엔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틴은 전쟁 초기에 징집병은 ‘작전’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말도 했었다. 그리고 징집병은 그들을 훈련시킬 부대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전투에 투입돼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롭 리는 “우크라이나군이 갈수록 서방의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는 상황에서, 징집병 대대들을 투입하지 않으면 러시아군은 현재 장악한 곳도 계속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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