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에 위기 몰린 스리랑카 정권, 새 총리에 야권 인사 임명
[경향신문]
사상 최악의 경제난에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고타바야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이 야권 인사를 새 총리로 임명하며 성난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라닐 위크레메싱게 전 총리를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통합국민당(UNP)의 대표인 위크레메싱게 전 총리는 이미 다섯 차례나 총리를 지낸 야당 정치인이다.
위크레메싱게 전 총리는 한때 라자팍사 가문의 최대 정적으로 꼽힌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2005년 대선에서 라자팍사 대통령의 형인 마힌다 라자팍사 전 총리와 대결을 벌였다. 2018년 벌어진 ‘두 총리 사태’로 라자팍사 가문과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당시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대통령은 위크레메싱게를 총리에서 해임하고 마힌다를 총리로 임명했다가 다시 그를 총리로 불러들였다.
라자팍사 대통령의 이번 인사는 경제난 극복을 위한 국민통합 의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마힌다 전 총리가 경제난의 책임을 지고 지난 9일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스리랑카 내각은 공석 상태다. 그간 라자팍사 대통령은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통합 내각을 새롭게 꾸려 위기를 극복하자고 밝혔지만 야당은 거부해왔다. 전날 위크레메싱게 전 총리가 라자팍사 대통령을 만나는 등 일부 야권에서는 최근 위기 극복을 위해 거국적 협력에 나서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위크레메싱게 총리 카드가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지는 미지수다. 그가 이끄는 UNP 의석은 단 1석뿐이며 제1야당인 국민의힘연합(SJB)의 리더 사지트 프레마다사는 위크레메싱게와 이견을 보이고 있다. BBC는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2019년 스리랑카 역사상 최악의 테러로 꼽히는 부활절 테러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지지율 급락을 겪었다는 점에서 적절한 인사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극심한 경제난에 따른 시민들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다. 수도 콜롬보에서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시민 카빈드야 테나쿤은 BBC와 인터뷰에서 “라자팍사 대통령은 시위가 벌어진 지난 한 달 동안 어디에 있었느냐”면서 “사람들은 당장 먹을 음식, 약도 없고 나라 전체는 마비상태”라고 말했다.
스리랑카의 재정난은 루피화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고, 식량·의료·의약품 등 필수 품목의 부족을 초래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달 초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하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주요 외화벌이 수단인 관광산업이 중단된 것이 경제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수 전문가들은 대통령과 총리, 재무장관까지 차지하며 스리랑카 정권을 틀어쥐고 있는 라자팍사 가문의 실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2019년 포퓰리즘적인 세금 감면, 2021년 농작물 작황 급감으로 이어진 외국산 화학 비료 금지 등이 대표적이다.
라자팍사 가문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는 연일 격화되고 있다. 지난 9일 마힌다 전 총리 지지자들이 반정부 시위자들을 공격하면서 유혈 시위 양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반정부 시위자들은 라자팍사 가문과 이들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의 재산을 공격 목표로 삼고 있다. 마힌다 전 총리 아들 소유의 리조트가 불타는 등 이날까지 라자팍사 가문 별장과 친 라자팍사 성향 현역 의원들의 주택 38채와 차량 47대가 불탄 것으로 집계됐다. 이 과정에서 9명 이상 숨지고 300여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 7일부터 국가비상사태를 발동한데 이어 9일 오후부터는 전국에 통행금지령을 발령했다. 10일부터 군경에 공공 자산을 훼손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들에게는 발포로 대응하라고 지시가 내려졌다. 11일부터 수도 콜롬보 등에는 군 장갑차가 대거 배치됐고 주요 지점에서 군인들이 검문에 나서면서 시위는 진정되는 국면이다.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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