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예순두 살 순자씨, 황혼이혼 후 취업전선에 뛰어들다

김유태 2022. 5. 1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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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 이순자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 1만5000원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쓴다.'

작년 여름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됐던 글 '실버 취준생 분투기'의 끝문장이다. 황혼이혼을 결심한 노년 여성이 취업현장에서 3년간 경험한 수모와 고통을 담은 원고지 기준 200장에 가까운 긴 논픽션으로, 지금도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확인 가능하다. 온라인에서 독자들이 블로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앞다퉈 퍼나를 정도로 이 글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밖으로 흘리든 안으로 삼키든 눈물 한 방울 쏟지 않을 수 없는 이 글의 주인공 이순자 씨는 문학상 당선 직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생전에 그가 썼던 글이 책으로 꿰매졌다. 신간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는 우리 엄마와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모든 '나'가 경험하게 될 남루한 삶의 맨 얼굴,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의 주인공 이순자 씨는 문학상 당선 직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진은 생전의 이순자 씨. [사진 제공 = 휴머니스트]
책에 실린 '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재독을 요한다. '이 글은 내가 62세에서 65세까지 겪은 취업 분투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일자리센터 취업창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라고 묻는 담당자의 묘한 입꼬리를 간파하는 할머니 이씨에게서 시작한다. 남편과 이혼한 이씨는 4대가 함께 사는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 때문에 평생 미뤄뒀던 문학 공부를 위해 노학으로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전공을 살려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자격증은 전부 '무쓸모'였다. 담당자의 위장된 안타까움, 그리고 이어지는 은근한 권유에 이씨는 이력서에 한 줄만 남긴다.

'중졸.'

자격증을 지우자 일자리는 쉽게 구해졌다. 굴레방다리를 지나 도착한 장소는 수건 접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외국인 노동자 틈바구니에서 산더미 같은 수건을 접었지만 단순노동은 쉽지 않았다. 목에 경련이 일어 사흘 만에 일을 관둬야 했다. 일주일을 채우지 못하면 사장은 임금 지급 의무가 없다. 이씨는 그제야 깨닫는다. '나 말고 다 외국인 근로자인데 나를 채용한 이유가 무얼까?'

센터에서 추천한 다음 일자리는 건물 청소였다. 대충 관리하면 된다지만 담당 구역은 상상을 초월했다. 비상계단 1층부터 8층까지. 그리고 지하 2층부터 지하 7층까지 주차장 전부. 그만두기만 하면 센터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오고, 이씨는 담당자가 자기 실적을 채우려 '뺑뺑이'를 돌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이씨는 일자리를 찾는 유목민 처지가 된다. 씻은 지 오래돼 누렇게 변질된 쌀로 밥을 하라는 어린이집 원장, 숨 쉬기 힘들면서도 허리를 더듬으며 성추행하는 환자, 배뇨장애가 있는 93세 노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불같이 화를 내는 아들. 이씨의 눈에 비친 세상은 노년 여성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세계였고, 그들은 평범한 가면 뒤로 이기심과 악함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아기를 돌보러 들어간 입주도우미 시기엔 이씨를 식모 부리듯 대하다가 "박카스 할머니" 운운하는 막돼먹은 여자가 나오는데, 일을 관둔 이씨가 노을을 바라보며 잠드는 장면은 참으로 먹먹하다.

책에는 이씨의 또 다른 산문 23편이 함께 실려 있다. 책 제목에 나오는 '깨꽃'에 관한 사연은 '은행나무 그루터기에 깨꽃 피었네'에 등장한다. 50년이 넘은 고옥을 싼값에 사서 시골 생활을 결심한 이씨는 집값의 3배나 되는 돈을 들여 겨우 집 꼴을 갖춘 뒤 이사한다. 아흔이 넘은 노부부는 서울에서 온 이씨를 진심으로 아끼고 반겨준다. 어디선가 날아와 피어난 은행나무 아래 깨꽃을 발견한 아흔 넘은 할머니는 이씨에게 깨꽃처럼 잠시 들러 정만 주고 떠나지 말고 평생 이 동네에 살기를 권한다.

"니 나 죽을 때까지 여그 살어라, 살어라, 살어라, 알았제?"

결혼 내내 이어진 남편의 폭력을 참다 못해 이혼을 결심한 이유, 주 4일 호스피스 병동에서 발마사지를 하며 느낀 사유들, 선천적 감각신경성 난청으로 어떤 소리는 잘 듣고 어떤 소리는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으로서 이씨의 삶, 급성 폐결핵으로 요강에 피를 뭉텅이로 쏟아내면서도 없는 살림에 병원에 가지 못한 유년의 기억까지 책에는 우리 주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씨의 시 '신년의 기도'는 울림이 크다. '나를 어제처럼 살게 하지 마시고/어제와 함께 살게 하소서//(중략)/ 어제도/오늘도/내일도/같은 무게로 살게 하소서.' 이 처연한 책은 한 평범했던 여성의 삶이 저토록 숭고하고 위대할 수 있음을 백지 위에 남겨진 생의 흔적으로 가만히 증명해낸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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