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노조 파괴 8년을 견디고, 노동자는 또 목숨을 끊었다

이혜리 기자 2022. 5. 13. 16: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2014년 6월30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조합원 고 염호석씨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염씨는 ‘노조가 승리하는 날 나를 뿌려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삼성의 탄압을 받았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노동자는 최근까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향해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해왔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고 최종범·염호석씨의 죽음 끝에 삼성은 ‘노조 와해’ 공작을 사과하고 무노조 경영을 폐기했지만, 죽음은 되풀이됐다.

13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삼성전자서비스 해고복직투쟁위원회(해복투)에서 활동하던 정우형씨(54)가 전날 오후 7시20분쯤 전북 장수군 자신의 사업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평소 삼성에 대한 항의 행동을 할 때 입던 빨간 조끼를 착용한 상태였다. 조끼 왼쪽엔 ‘원직 복귀’, 오른 쪽엔 ‘삼성 해복투’라는 명찰이 달려있었다.

정씨는 2015년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일할 때 노조 조합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들에서는 노조 무력화 시도가 계속됐다. 천안센터의 경우 해고를 쉽게하는 취업규칙을 만든 게 논란이 됐다. 정씨는 취업규칙이 노조 저지 목적이라고 항의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이후 정씨는 ‘돈 때문에 벌인 일’이라는 소문에 시달렸고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정씨 가족이 센터와 합의해 정씨가 일을 그만두게 됐는데, 그 배경에 삼성의 노조 와해 계획이 있었다는 점이 나중에 드러났다.

2018년 검찰이 삼성 노조 와해 수사에 착수하면서 확보한 삼성 내부 문건엔 정씨도 언급됐다고 한다.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 과정에서는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이 노조 설립 주동자를 ‘문제인력’으로 관리하고 징계사유를 추출해 퇴직을 유도하며, 노조가 있는 협력사는 폐업하는 등 노조 활동을 조직적·체계적으로 방해한 정황이 드러났다. 노조 설립 시도가 있을 경우 조기 와해를 원칙으로 하고, 와해에 실패하더라도 장기 고사화를 목표로 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이 담긴 문건이 공개됐다.

검찰 수사 이후 삼성전자서비스는 협력업체에서 일했던 서비스기사 등 7400명을 정규직으로 직접 채용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해고되거나 노조 와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퇴직한 노동자들은 채용되지 못했다. 해복투엔 정씨를 포함해 6명이 남아 투쟁을 계속해왔다.

2021년 8월9일 삼성전자가 사옥으로 사용하는 서울 서초동의 높은 건물 아래에서 삼성 사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씨는 생전에 복직을 원했다. 복직은 삼성 노조 와해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라는 것이다. 삼성은 별다른 답변이 없었고, 정씨는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지금 한 해고 노동자가 고독의 늪에 몸부림치고 헤쳐나오려 허우적인다. 하지만 여기까지인 듯하다”며 죽음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 다른 글에서는 “8년을 참고 또 참았다. 더 기다리라면 자신이 없다”고 썼다.

정씨는 지난달 이 부회장에게 “노조한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자행한 (삼성의) 범죄를 거듭 만천하에 공표하고 제대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의 글을 우편으로 보냈으나 반송됐다. 정씨는 유서에 “내 죽거든 화장해 동지들에게 한줌씩 나눠줘 삼성에 뿌릴 수 있게 부탁한다”고 썼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은 “삼성재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 탄압을 했다”며 “그 탄압으로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길거리로 쫓긴 피해 노동자들의 문제를 모두가 외면했고, 결국 정씨가 힘의 한계와 좌절을 느껴 혼자의 결단으로 풀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해복투 노동자 중 3명은 삼성전자서비스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내 2심에서 승소한 상태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1월 삼성전자서비스가 노동자들 업무를 지휘·감독했는데도 직접 고용하지 않았다며 불법 파견이라고 판단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방침 속에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천안센터 노조 조합원이던 최종범씨가 2013년 10월, 양산센터 노조 분회장이던 염호석씨가 2014년 5월 세상을 떴다. 안양근 해복투 위원장은 “(정씨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죽지 말고 같이 싸우자’고 말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해 목이 메이고 가슴이 아프다”며 “삼성은 반성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측은 “안타까운 일이 벌어져서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