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취준생' 순자씨의 '찐하게 강한' 68년 인생[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2. 5. 13.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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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해 ‘실버 취준생 분투기’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를 모았던 고 이순자 작가의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와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가 함께 출간됐다. 여성, 청각장애인, 노인, 기초생활수급자 등 소수자로서의 차별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는 고인의 삶이 담백하고도 따스한 언어로 담겼다. 휴머니스트 제공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이순자 지음|휴머니스트|256쪽|1만5000원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이순자 지음|휴머니스트|192쪽|1만2000원

지난해 하반기 발굴된 보물과 같은 글이 있었다. 고 이순자 작가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다. 지난해 7월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분에 당선된 이 작품은 여성 노인이 돈을 벌기 위해 마주하는 노동 현장의 열악한 현실을 당사자의 언어로 생생하게 전달했다.

각종 자격증과 이력은 여성 노인에게 군더더기일 뿐이었다. ‘중졸’이란 학력만이 저임금으로 할 수 있는 청소·수건접기·각종 돌봄노동에 적합했다. 고된 육체노동과 저임금·임금체불·성추행에 시달리지만 이를 그려내는 언어는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도 품위있고, 현실을 고발하는 힘이 있으면서도 따스했다.

뒤늦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 글이 화제에 올랐다. 2030 여성들은 60대 여성 노인의 미래가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예감하며 열악한 노동시장과 사회제도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미 이 작가가 지난해 8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가 남긴 원고들이 책으로 엮였다.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와 유고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가 함께 출간됐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62세부터 65세까지 겪은 취업과 노동현실을 그렸다면, 두 책은 이 작가의 삶의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글들로 채워졌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수면에 드러난 빙산의 반짝이는 일각이었다면 두 책은 심연에 자리한 거대한 삶의 고통과 이를 뚫고 나오는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작가의 삶은 ‘소수자의 삶’ 그 자체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전사해 ‘유복자’로 태어났고, 청각장애인이며,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황혼이혼을 한 ‘독거 여성노인’으로서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을 했다.

남성이 가장으로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던 시대에 유복자이자 막내로 태어난 이 작가의 삶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미싱일을 하며 가난한 생계를 꾸리느라 아이들을 세세히 돌볼 여유가 없었다. 감각신경성 난청으로 높은 여성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낮은 남성의 목소리는 잘 들을 수 없고, 소란스러운 곳에선 소리를 분간할 수 없는 그를 가까운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소외감에 농아인협회를 찾아가지만 사투리를 현란한 손짓으로 구사하는 농인들 사이에 온전히 낄 수 없었다. “비장애인 사회에서도 장애인 사회에도 편입되지 못하는 경계인”으로서 그는 설 곳을 잃었다.

결혼을 해 4대가 한 집에 사는 종가집 며느리로서 각종 명절과 경조사때 수백명 친지들의 끼니를 책임지며 집안을 이끌었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렸으며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고도 그 이유를 이 작가의 청각장애 탓으로 돌린다. “전화 통화가 불편해 바람을 피웠다는 남편의 핑계”를 대며 오히려 이 작가를 ‘가해자’로 만들었다. 이 작가는 아이들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을 한다. 노년의 이혼은 삶의 기반을 허무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고 희망을 쫓는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성장하게 된다” “인생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고통을 잘 따라가 볼 일이다. 꿀같이 다디단 열매가 거기 스윽 열려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이 작가의 특별함이다.

그는 위축되는 대신 담대했고,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기꺼이 헤쳐나갔다. 청각장애로 학업의 꿈을 접고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1970년대 명동성당에서 만난 대학생 노동자들과 함께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서기도 한다. 사무직으로 취직한 일자리에선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조설립을 도와주다가 일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그는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생각하고 실행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작가는 약하고 어려운 이들에겐 허리를 숙여 품어안는 너른 사랑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산업재해병원에서 사지를 잃은 노동자들을 돌보고, 노년에 요양보호사가 되어 만난 노인들을 진심으로 돌본다. 결핍과 고통은 그를 망가뜨리지 못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성장한다. 그는 이혼 후 평생 꿈이었던 문학공부를 위해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 결국 작가가 되었다.

휴머니스트는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출간 전 책의 일부를 가제본으로 엮어 미리볼 수 있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독자들이 이를 읽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후기.
휴머니스트는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출간 전 책의 일부를 가제본으로 엮어 미리볼 수 있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독자들이 이를 읽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후기.

책엔 이 작가를 통해 들을 수 있는 다양한 노인들의 삶 또한 들어있다. 가난한 여성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었던 ‘노동의 역사’가 들어있다.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 했던 순분할매는 젊은 시절 고된 밭일을 하다 쓰러져 육체노동마저 어려워 굶어죽을 처지가 되자 대리모 제안을 승낙한다. 작가 자신도 어린 시절엔 ‘여공’, 노후에는 청소·돌봄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요양보호사를 하며 만난 다양한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의 신산한 삶과 함께 돌봄의 의미에 대해 다시묻게 한다.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는 산문집과 한 몸같은 책이다. 산문집에 등장했던 사람들이 시적 언어로 다채롭게 그려지며, 꿋꿋했던 시인이 내면에 깊이 품어뒀던 고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작가가 68년의 삶을 헤쳐나간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울고 웃다 마지막엔 두 손을 모아 기도하게 된다.

“나를 어제처럼 살게 하지 마시고/ 어제와 함께 살게 하소서…내게서 떠나는 것들이/ 조용히 문지방을 넘게 하시고/ 다가오는 것들을/ 가만히 받아 안게 하소서”(‘신년의 기도’)

방금 약하면서도 강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한 작가의 탄생을 목격했다. “고순(고소한) 냄새만 풍기고 가삐”렸지만, 그나마 뒤늦게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 다행이다. 그가 원룸에서 다리미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쓰지 않았다면 영영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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