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 인종'이라는 예쁜 담요에 덮인 아시아인 차별[책과 삶]

김지혜 기자 2022. 5. 1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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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아시아인이라는 이유
정회옥 지음 | 후마니타스 | 264쪽 | 1만6000원

아시아인의 이주가 본격화된 19세기 중반 이후 100여년간 서구인은 아시아인을 ‘더러운’ 혹은 ‘두려운’ 황인종으로 대상화하며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아시아인이 서구를 위협한다는 공포를 표현한 그림 ‘문어와 같은 몽골 인종, 오스트레일리아를 움켜쥐다’는 이를 잘 보여준다. 후마니타스 제공


“모든 비백인 인종은 유사하게 열등하므로, 중국인을 포함해 비백인의 피가 흐르는 누구도 백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다.”

185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대법원 판사 존 머리는 중국인 링싱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백인 조지 홀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며 이같이 말했다. “흑인, 인디언, 혼혈인 등은 법정에서 백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권리가 없다”는 법 조항을 근거로 중국인 목격자의 증언을 배척한 것이다. 재판부는 “흑인, 인디언, 혼혈인”과 “유사하게 열등”한 “비백인 인종”인 중국인에게는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권을 누릴 자격이 없음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167년이 흐른 2021년 3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백인 남성 로버트 애런 롱이 스파와 마사지숍에서 총기를 난사해 아시아계 여성 6명(한인 4명) 포함, 8명이 숨졌다. 아시아인 여성 혐오에서 기인한 범죄라는 분석이 곧바로 시민사회에서 나왔지만, 증오범죄 혐의 적용 여부는 관할 지역 검찰에 따라 달라졌다. 미국 사회에서 안전한 삶에 대한 아시아계 이주민의 권리는 여전히 위태롭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사회 곳곳에서 아시아인 혐오 범죄가 급증한 계기가 됐다. 아시아인들이 서구 사회로 이민한 이래 170여년이 흘렀다. 이들을 짓누르는 차별의 무게는 여전히 무겁고, 그럼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아시안이라는 이유>는 서구에서 ‘모범적 소수인종’으로 인식되며 차별에 대한 침묵을 종용받아온 아시아계 이주민을 둘러싼 혐오의 역사와 사회적 배경, 신념 체계 전반을 짚는 책이다.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더러운’ 또는 ‘위험한 황인종’에서,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앞서가는 근면한 ‘명예 백인’까지…. 백인 주류 사회가 아시아계 이주민에게 입맛대로 부여한 인종주의 낙인의 역사를 돌아본다. 책은 서구에서 인종 이데올로기란 소수 인종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발명됐다는 관점을 분명히 하며, 처음엔 ‘값싼 노동력’이라는 산업적 필요에 의해 미국 사회에 진입한 아시아인이 점차 흑인 등 여타 소수 인종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중간적’ 위치에 올라서는 과정에 주목한다.


캐시 박 홍의 책 <마이너 필링스>가 아시아계 미국인 당사자가 느낀 ‘소수적 감정’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국내 독자들을 대상으로 아시아계 이민자를 향한 ‘보이지 않는 차별’의 실체를 종합적으로 제시한다. 다문화정치론, 소수자정치론 등을 연구하며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정회옥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해 같은 주제로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강연을 펼쳤던 경험을 살려 서구 중심주의부터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까지 인종주의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이어간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아시아계 혐오 범죄의 불을 댕긴 까닭은 무엇인가? 책은 “질병의 인종화”라는 답부터 내놓는다. 저자는 시대를 불문하고 지속돼 온 “경제 불황, 전쟁, 전염병 유행 같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희생양 찾기”에 혐오의 연원이 있다고 본다. 위기의 희생양은 대개 사회 속 소수자, 혹은 사회 밖 대상화된 세계에서 찾기 마련이다. 서구 사회의 유구한 ‘소수자’이자, ‘정복의 대상’인 아시아는 특히 질병과 동일시되곤 했다. 유럽인들은 14세기 흑사병을 ‘오리엔트 역병’으로, 19세기 콜레라는 ‘아시아병’이라 불렀다. 병의 발원이 미지의 아시아일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에서 비롯한 말이다. 1899년 하와이에서 선페스트(흑사병의 일종)가 유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정부는 차이나타운을 병의 진원지로 지목해 불을 질렀고, 아시아인을 공공장소로 소집해 남녀불문 발가벗겨 목욕을 강요했다. 책은 이처럼 아시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코로나19라는 전염병 앞에 다시금 실체를 드러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1900년 미국 하와이에서 선페스트가 확산하자 공공장소에 아시아인을 소집해 훈증 소독을 시키는 모습. 후마니타스 제공


물론 문제가 간단하지만은 않다. 애초에 아시아를 대상화하고 주변화하는 인종주의의 탄생 배경을 살펴야 한다. 책은 백인에 의한 비백인의 지배를 정당화한 ‘인종’ 개념이 종교, 과학, 법이라는 세 조력자를 통해 성립·유포되는 과정을 돌아보며, 아시아인이라는 인종 집단이 만들어지는 역사를 되짚는다. 중국인들의 미국 이주 역사는 1848년에 시작돼 1860~1870년대에 본격화된다. 애초 미국의 목표는 ‘백인 국가 건설’이었으나, 유럽 이민자만으로는 ‘값싼 노동력’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던 탓에 아시아의 유색인종 이민자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민 초기 중국인 노동자들은 흑인 노예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으로 다뤄졌다. 앞서 무죄로 석방된 조지 홀 사건이 보여주듯, 백인이 중국인을 살해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이후 같은 형태의 노동 이민자로 미국에 온 일본인·한국인·필리핀인·인도인 역시 중국인과 다름없이 비인간 취급을 받았다. 아시아인에겐 위험하고 지저분한 ‘3D 직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더럽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백인의 일자리와 영토를 탐내는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다. 혐오는 배제로 이어졌다. 1882년 중국인들의 이민을 금지한 ‘중국인 배척법’을 시작으로 1913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 1924년 아랍인과 아시아인의 이민을 금지한 ‘아시아인 배척법’까지, 미국은 아시아계 이민자라는 ‘티끌’을 지워내고 싶어했다.

이 같은 혐오와 배제의 논리 기저에는 아시아인을 ‘백인보다 못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유럽과 미국의 재산을 노리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는 인종주의 담론이 있었다. 당대 인종주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친 1853년 프랑스 외교관 겸 작가 조지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의 저서 <인종 불평등론>은 인종을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세 유형”으로 분류해 황인종을 백인종보다는 열등하지만 흑인종보다는 우월한 ‘중간적’ 위치에 놓았다. 경제 발전을 위한 노동력 혹은 식민지로서 아시아를 활용하기 위해 구성한 차별의 논리다. 그런가 하면 1895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그림 ‘황화’는 “야만적인 황인종이 서구를 지배하리라”는 ‘황화론’의 주장을 서구에 널리 퍼뜨렸다. 아시아는 ‘길들여야 할’ 폭력적인 대상이라는 주장도 함께 퍼졌다.

반전이 있다. 저자는 “미국의 아시아인은 19세기 중반 이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종화된 뒤 1960년대 이후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종화되는 극단적인 경험을 했다”고 설명한다. 1965년 미국의 민권운동과 함께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한 이민법이 제정된 이후 미국 주요 매체들은 아시아인을 “성실하고 근면하며,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인종으로 새롭게 그려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다수의 아시아계 미국인을 옥죄는 ‘모범 소수민족’(1966년 사회학자 윌리엄 피터슨이 창안)의 신화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갑작스러운 칭송 역시 백인 중심의 착취의 논리에서 출발한 기획이라는 점에서 냉혹한 배제로 이어졌던 과거의 차별과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인이 서구를 위협한다는 공포를 표현한 그림 ‘절정에 달한 황색 공포’, 중국인 남성의 폭력에 희생된 쓰러져 있는 백인 여성은 서구 세계를 상징한다. 후마니타스 제공


저자는 이 같은 인종 담론이 “아시아인에게 백인성의 공간을 조금 내주고 이를 통해 흑백 갈등을 흑인 대 아시아인의 갈등으로 치환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수백년간 쌓인 폐해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던 흑인들의 목소리”를 “비모범적인 소수민족”의 것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모범 소수인종 신화’를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덮는 예쁜 담요”라고 표현한 미국 작가 이제오마 올루오의 표현을 인용한다. 이 신화 속에서 아시아계는 흑인 등 여타 소수 인종 집단과 오랫동안 분열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심화됐다. 그렇다고 백인 주류와 같아질 수도 없었다. 아시아계는 ‘대나무 천장’에 갇힌 “중간 소수민족”으로 정체화됐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아시아계 이주민을 옭아맨 인종주의의 굴레가 비단 서구의 악습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 사회는 거주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5%(2019년 기준 4.9%)를 점하는 ‘다문화 사회’에 임박해 있다. 그러나 동남아 저개발 국가 출신 이주민,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 동포 등 이주민에 대한 차별의 문화와 제도는 시정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이주민 노동자와 중국 동포들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과 혐오는 어디에서 오는지 자문해볼 것을 요청한다. 경제와 정치의 필요에 따라 소수 집단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온 서구 인종주의의 답습인 “복제 오리엔탈리즘”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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