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하고 부강한 독일을 만든 '네 번의 변곡점'[책과 삶]

문학수 선임기자 2022. 5. 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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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독일은 왜 잘하는가
존 캠프너 지음·박세연 옮김|열린책들|456쪽|2만3000원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지난해 10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추모관에서 ‘영원의 불’을 밝히고 머리 숙여 참배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서른다섯 살의 앙겔라 메르켈은 또래 친구들과 달리 들뜨지 않았다. 어머니 헤를린트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조심하세요.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목요일이었다. 그는 늘 하던 일을 했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친구와 공중목욕탕에도 갔다. 나중에 그는 “(당시에) 내가 들은 소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야 거리의 행진 인파 속으로 들어갔는데,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저는 혼자였지만 군중을 따라 걸었죠. 그러다 베를린 서쪽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독일인들에게 ‘무티’(엄마)라고 불렸던 유명 인사의 회고는 상당히 흥미롭다. 독일 전체가 흥분으로 들떴던 며칠 동안 서독 정부는 ‘서쪽’으로 넘어온 동독인들에게 클라라 슈만(피아니스트, 슈만의 아내)의 얼굴이 인쇄된 100마르크 지폐를 ‘환영 자금’으로 나눠줬다. 동독 사람들은 그 돈으로 질 좋은 맥주를 마시고 기념품을 샀다. 가족에게 줄 선물도 샀다. 가장 많이 산 것은 바나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독에서는 비쌌지만 서독에서는 값싼 과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르켈은 어떤 물건도 사지 않고 돈을 아꼈다. “(서독 지역의 유료) 화장실에 가거나 차를 한 잔 마시려면 돈이 필요했어요. 11월이었고 추웠거든요.” 물론 그도 서베를린 켐핀스키 호텔에서 어머니와 함께 굴을 먹을 계획을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2019년 어머니가 아흔 살로 타계할 때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불과 2년 후, 그는 장관 자리에 올랐고 그때부터 사생활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 언론인이다. 독일에 파견돼 꽤 오랜 기간 일했다. 1990년 메르켈을 처음 만났다는 그는 “어딜 가든 외교적이고 신중한 사람” “(정적의) 조롱에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이겼다고 확신하는 사람” “성실하게 준비하는 사람” 등의 호평을 내놓는다. 어찌 보자면 메르켈에 대한 상찬이 애정과 존경의 수준에까지 이른다. “많은 국가에서 아예 불가능하거나 오래 가지 못하는” 대연정(GroKo)을 이끌면서 “그것을 안정의 모델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 가장 성공적인 행정부”로 이끌었다고 평한다. 메르켈에 대해 저자가 내리는 결론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신뢰와 신중함”이다. ‘정치인 메르켈’의 캐릭터일 뿐 아니라, “오늘날 독일 사회를 지배하는 두 가지 특성”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러나 이 책은 메르켈 평전이 아니다.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통일 이후 150년(2021년 1월)을 넘긴 오늘의 독일을 평가하는 것, “군국주의와 전쟁, 홀로코스트, 분열”을 겪었던 이 나라가,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성숙하고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성숙함’ ‘신뢰’ ‘신중함’ ‘자신감’ 등의 단어로 오늘날의 독일을 수식한다. 독일은 왜 그렇게 될 수 있었던가(Why the Germans do it Better?).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된 이후, “오늘날의 독일은 세상이 지금껏 봐왔던 최고의 독일”(미국의 정치평론가 조지 윌)이라는 평가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이 2020년 영어로 출판된 이 책의 원제다.

저자는 독일의 정체성을 만든 “네 번의 계기”에 주목한다. 첫째는 1949년의 ‘기본법’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자신이 독일에서 겪었던 “규칙에 대한 강박”을 떠올린다. 새벽 4시에 교통 신호등을 무시했다가 경찰에게 딱지를 떼인 경험을 거론하는가 하면, 어느날 아파트 발코니에서 록음악을 듣고 있는데 루헤차이트(Ruhezeit) 시간이 되자 여자친구가 라디오를 꺼버린 기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루헤차이트는 ‘조용히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대개 오후 1시부터 3시, 저녁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다. 다른 이들의 휴식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특히 “노인을 배려”하기 위해서인데, 이렇듯이 사회적 약속을 엄수하는 독일인들의 인식과 태도는 “세계적으로 위대한 헌법적 성취”로 평가받는 ‘기본법’의 성과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전승국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등이 “어제의 영광”으로 국가적 정체성을 만든 반면, 독일은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준거점이 없었”기에, “절차에 대해,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하는 것에 대해 열정적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이어 저자는 1968년의 68혁명, 1989년 동서독 통일, 2015년의 난민 수용 결정 등을 “결정적 계기”로 설명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패전 직후의 독일 사회에서는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젊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68혁명 이후부터 반성과 참회가 확산됐다. 우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들도 합류해 “독일의 도덕적 나침반”을 새롭게 세웠다. 2015년의 난민 수용은 메르켈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2014년부터 2019년 7월까지 140만명이 넘는 난민이 독일에서 망명을 신청했는데, 이는 유럽연합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독일은 그중 100만명을 받아들였다. 메르켈은 “우리는 해결할 수 있다”라고 했고, 과거에 나치가 권력을 잡았던 첫번째 도시였던 뮌헨의 주민들은 “난민들에게 환영의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책은 독일에 보내는 ‘러브 레터’처럼 읽히기도 한다. 오늘날 독일의 ‘국가적 미덕’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다양하다. 환경문제에 대한 대처,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에서도 독일은 단연 세계 최고라고 평한다. 연예인 스타일의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하는 포퓰리즘 시대에도, 독일인들은 ‘신중한 선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찬사를 보낸다. 그리하여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말한다. “독일은 국가주의와 반계몽주의, 그리고 두려움의 시대에 유럽 최고의 희망이다. 누가 급속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유럽의 가치를 대변할 것인가? 누가 권위주의 국가에 맞설 것인가? 누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앞장설 것인가? 독일만이 그럴 수 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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