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자가 승리했다면 나는 다수파인가..날카로움이 주는 신선한 재미[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이종산 소설가 2022. 5. 1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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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극히 드문 개들만이
이나경 지음|아작|348쪽|1만4800원


어떤 장르물이든 장르 안에서 자주 쓰이는 코드나 소재가 있다. SF에서는 타임리프나 로봇, 게임, 최근에는 증강현실 이야기가 많고, 로맨스에서는 환생이나 계약결혼 이야기가 꾸준히 인기 있다. 순문학도 장르의 한 가지로 보자면 과거에 묻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나 이별한 사람과 다시 조우하는 이야기 등이 자주 다뤄진다. 장르물이라는 것 자체가 코드나 소재를 가지고 노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중복되는 소재들이 많은 판 안에서 새로운 것이 튀어나올 때는 등산 중에 신선한 물을 마신 것처럼 눈이 반짝 뜨이게 된다.

단편소설 ‘다수파’는 언제나 ‘다수’를 고르는 남자의 이야기다. 로봇이나 증강현실도 안 나오고, 반전에 타임리프 코드가 있다거나, 귀신이나 괴물이 나오지도 않는다. 진짜로 항상 다수를 고르는 남자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떤 기업의 설문조사에 참여했다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 항상 다수가 고른 쪽을 선택하는 재능이다. 이 재능은 얼핏 쓸모없어 보이지만, 기업에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2530만명 중 300개 문항에서 100%의 확률로 다수에 속하는 답을 고른 사람은 총 8명이었고, 주인공이 그중 하나였다.

주인공은 그 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달에 한 번 기업의 담당자를 만나 그가 내미는 상품 후보군에서 한 가지를 고른다. 어떤 상품이 더 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지를 예측하기 위해서다.

이 이야기의 화자는 주인공의 딸인데, 화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아빠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아빠가 탄 택시는 늘 아빠가 원하는 행선지로 갔어.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의원이나 시장, 도지사 등등 모두가 아빠의 선택을 받았다는 얘기야. 내가 표를 준 사람이 어김없이 당선됐거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고.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주인은 바로 아빠 아니겠니?”

화자는 다수파의 세상에서 아빠는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비극적인 일이 닥치면서 그 믿음은 무너지게 된다.

문학 자체가 그렇지만 장르물은 특히 소수자의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랄까? 그런데 이 소설은 제목부터 ‘다수파’라니. 정말 과감한 제목이 아닌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제목에 숨겨진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다수파에 속한다고 믿었던 한 사람이 개인이 보호되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이 결국은 소수파였음을 깨닫는 과정은 씁쓸하지만 날카롭다.

‘다수파’가 수록된 이나경의 소설집 <극히 드문 개들만이>는 수록작 한두 개가 아니라 반드시 책 전체를 다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소설집을 여는 초단편 ‘냉장고에 코끼리 집어넣기’는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방법’이 아니라 ‘이유’를 상상하며 신선한 재미를 준다.

이어지는 표제작 ‘극히 드문 개들만이’는 SF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이 게임을 하며 신적인 관찰자가 되는 이야기와 타임리프 소재가 섞여 있는데, 아주 흔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신선한 느낌을 준다. 보통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신적 관찰자가 되어 흥미롭게 바라보는 대상은 인간 혹은 인간적 존재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극히 드문 개들만이>에서 주인공은 개 한 마리를 계속해서 따라가며 관찰한다. 버그로 반복되는 매일 속에서 개 한 마리가 삶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그려지는 한편, 주인공의 인생도 계속 진행되는데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결말에서 멋지게 겹쳐진다.

‘누나 노릇’은 흡혈귀 이야기를 지극히 한국적으로 풀어냈고, 마법의 포스트잇을 소재로 하는 ‘포스트잇 사용법’은 이 작품만 따로 단권으로 나왔으면 어떨까 싶은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흥미로운 아동·청소년 문학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갑자기 좀 딴 얘기지만, 오늘은 오전에 가게가 한산해서 유튜브로 대통령 취임식 라이브를 봤다. 지루할 줄 알았는데 아빠와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떨면서 보니 꽤 재밌었다. 취임식에 온 많은 사람을 보며 ‘저 사람들은 누굴 뽑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심으로 축하를 하러 온 사람도, 그저 재미난 행사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온 사람도 있겠지 싶었다. 취임식을 보고 ‘다수파’를 다시 읽으니 이 소설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선거에서 누구를 뽑았든 보호되어야 할 순간에 보호되지 못한다면 그는 소수자다. 또, 누구를 뽑았는지와 상관없이, 혹은 투표권이 있는지 없는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너무 뻔하고 이상적인 이야기일까? 그러나 취임식 연설을 들으며 뻔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현실로 이루려는 시도가 정치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취임식 연설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소설이라는 장르는 사라지지 않을까?

이종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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