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24화)[연재소설]

에린 2022. 5. 1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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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우메다에 있는 H백화점에 도착한 건 늦은 오후였다. 달팽이관 같은 지하 주차장은 초입부터 만차 표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갔을 때 여유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공중정원으로 유명한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기로 한 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세 사람이 시간을 맞춰 함께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야경을 보기엔 좀 이른 시간이라 맛집으로 유명한 돈가스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당 앞에는 대기 손님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안내하는 직원이 캡틴에게 번호표를 주고 바쁘게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캡틴과 세라는 의자에 앉아 메뉴를 골랐지만, 도경은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았다. 식당 간판을 찍는가 하면 대기 줄에 선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었다. 캡틴은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자 비상구로 가 전화를 받았다.

“사람들 뒷모습은 왜 찍어요?”

세라가 도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실적이잖아요. 보이지 않는 뒷모습이야말로 그런 부분이죠.”

“사람들의 표정이 더 사실적이지 않아요?”

도경은 그제야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을 돌려봤다.

“사람들은 카메라 렌즈를 보면 갑자기 현실을 잊고 웃어 버리죠. 돈가스를 먹겠다고 자기가 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진이 잘 나올 각도를 찾아 얼굴을 움직여요. 근데 뒷모습은 어떤지 알아요? 이미 다리는 퉁퉁 붓고 허리는 반쯤 휘어 벽에 기대고 있어요. 뭐가 사실이죠?”

세라는 계속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는 도경에게 다시 물었다.

“어차피 세상 모든 일에는 양가성이 있잖아요. 이게 보편적이지 않나요? 보이지 않는 곳에 진실이 숨어 있다는 건 비약 아닌가요?”

“난 진실이라고 말 한 적 없어요. 사실이라고 했지. 진실과 사실은 완전히 다르죠.”

도경은 카메라를 무릎에 내려놓고 정색했다.

캡틴이 자리로 돌아오자 직원이 34번을 불렀다.

“진실이든 사실이든, 일단 먹고 봅시다.”

식사를 마치고 스카이 빌딩으로 향했다. 캡틴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댔다.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계속 울렸다.

“전화 안 받으세요?”

세라의 말에 캡틴은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어떡하죠. 오늘 약속이 겹쳐 버렸네요. 다케시상이 계속 전화를 하네요. 친구들이 다 모였다고 늦게라도 오라고 성화네요.”

“아, 그러세요. 그러면 ….”

세라는 도경과 남을 생각을 하니 난처했다. 그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진만 찍어댈 것이고 어쩌다 한두 마디 건네면 대답이 되돌아오기까지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야경을 보면서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도경이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내릴 준비를 했다.

“전 어차피 사진 찍으러 온 거니까 남아서 찍고 가겠습니다.”

“세라 씨도 함께 구경하고 와요.”

캡틴이 룸밀러로 비친 세라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저는, 돌아….”

도경이 차에서 내리다 말고 뒤돌아봤다.

“안 내려요?”

밤이 깊어지자 야경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엘리베이터가 30층을 넘어가자 세라는 호흡을 크게 쉬며 안전 바를 붙잡았다. 도경이 바라봤을 때 그녀의 볼은 열꽃이 인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전망대로 올라갔다. 세라는 탁 트인 사방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대한 불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또 다른 우주를 마주 보는 것 같았다.

도경도 카메라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캄캄한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수많은 불빛에 둘러싸여 자신이 피사체가 된 기분이었다. 빌딩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대교를 건너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어느 시골에서 마주한 반딧불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아.”

세라가 들뜬 목소리로 감탄했다.

어둠이 번져갈수록 강물을 가로지르는 불빛들이 은하수처럼 빛을 뿜었다.

“굉장한데!”


도경은 어느새 카메라를 들고 우주처럼 펼쳐진 광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공중정원에는 꽃들도 정원수도 아무것도 없었다. 발아래 펼쳐진 보석 같은 섬광들이 꽃이고 나무였다.

도경이 포토존을 찾아 이동하며 사진을 찍었다. 세라는 오사카를 가로지르는 강줄기를 보며 도경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한 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도경의 카메라는 어느 한곳에서 멈췄다. 세라는 도경의 카메라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해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언제부터인가 도경의 카메라가 조금씩 불편해졌다. 그가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는 건 알고 있지만, 카메라 렌즈와 눈이 자주 마주칠 때면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의 말대로 잠을 설쳐 눈이 부어있거나 텅 빈 눈으로 골목을 걸어 다니다가 그의 렌즈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래서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도경은 시선을 멀리 보냈다. 세라는 카메라를 피해 조금은 떨어져 섰다. 발밑을 보며 신기한 듯 손바닥을 펴고 잡는 시늉을 했다.

“저기 사람들이 있다는 게 믿어져요?점 보다도 작은 크기로 말이죠. ”

주위를 둘러보며 불쑥 올라와 있는 건물들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보드게임에서 건물과 땅을 주워 담으며 세상의 부자 맛을 느끼곤 했었는데 여기에서는 또 다른 게임의 승자가 된 기분이었다.

“혹시, 종교 있어요?”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어릴 때 아빠 따라서 교회 간 게 다예요. 그건 왜요?”

“나는 무교지만, 이렇게 높은 곳에 오면 고해성사 비슷한 걸 해요. 세상을 밟고 서서 그동안 지은 죄를 한 번에 퉁 치는 거죠.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누구 한 명은 들어주지 않겠어요?”

“그러면 뭐가 좀 달라지나요?”

“속마음을 털고 나면 세상과 나를 분리해서 바라보게 돼요.”

“그게 무슨 의미죠?”

“수백 장의 사진을 보고 쓸만한 게 없다고 거절하는 광고주나 마음에 들 때까지 얼굴 보정해 달라는 어이없는 고객이나, 어제까지 내 일상을 쥐고 흔들던 사람들이 지금 발아래 저 밑에 있다고 보면, 그냥 그들은 점 같은 존재라는 것뿐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겉보기에 도경은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화법은 늘 세라를 긴장시켰고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그를 판단했던 잣대도 조금씩 느슨해져 갔다.

옆에서 셀카를 찍던 커플이 도경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그는 커플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여러 장을 더 찍고 카메라를 내주었다.

“계속 라멘집에서 일할 거예요?”

도경이 말했다.

“사실 구상 중인 일이 있는데, 누군가를 먼저 설득해야 되거든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빨리 시작해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요시메의 화장품이 발효추출 원액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세라는 천연 화장수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겼다. 알람시계를 사서 침대맡에 놓고, 라멘집 알바가 끝나면 요시메을 보러 화장품 가게에 들렀다. 하루의 루틴을 정해 놓으니 시간 틈 사이로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요시메가 세라를 니코리라고 부르는 날들은 많아졌고 시장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무표정으로 있다가도 니코리라 부르며 환하게 웃을 때면 세라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제 다른 존재, 니코리로 살면 어떻게 되는지, 세라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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