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레전드가 기억한 조던, 매직 이전의 '슈퍼 드림팀'

손대범 2022. 5. 13. 13: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점프볼=손대범 전문기자] 제임스 하든, 러셀 웨스트브룩, 야니스 아테토쿤보, 루카 돈치치의 공통점은?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차례로 NBA 슈퍼스타로 부상한 이들은 기량 뿐 아니라 기록에서도 남다른 업적을 쌓아왔다. 트리플더블, 고득점, 혹은 최연소 기록 등이 나올 때면 미디어에서는 어김없이 과거 슈퍼스타들의 기록을 소환했다.

빌 러셀, 오스카 로벌슨, 밥 페팃, 톰 하인손 등이다.

1950년대, 1960년대에 등장한 이들은 각자 방식으로 명성을 쌓으며 전설 반열에 올랐고, 이 중 대부분은 NBA의 75주년 기념팀에 이름을 올랐다.

그렇다면 이들이 한 팀에 모여 뛰었다면 어땠을까.

13일(한국시간) 오전, NBA 공인구를 공급하는 윌슨(Wilson)은 세계 미디어 및 농구 인플루언서를 대상으로 줌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NBA 득점왕(1956, 1959)이자 리바운드 1위(1956), 그리고 2번이나 MVP(1956, 1959)를 차지했던 밥 페팃(89세, 206cm)도 함께 했다.

1954년 드래프트 2순위였던 페팃은 애틀랜타 호크스를 우승(1958년)으로 이끌기도 했던 인물로, NBA 역대 최초로 통산 2만 득점을 넘긴 선수이기도 하다. 당연히 은퇴 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50주년과 75주년 팀에도 당당히 후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날 컨퍼런스에서 페팃이 했던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바로 1964년에 탄생했던 '전설의 팀'이었다.

1964년, NBA는 미 정부와 함께 'State Department goodwill tour'를 기획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미 국부무 친선 투어' 정도로 할 수 있겠다.

당시만 해도 프로선수는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지만, 이는 메달이 걸린 국제대회가 아니었기에 국무부는 '최상의 팀'을 꾸렸다.

멤버는 다음과 같다.

감독 : 레드 아워백 (보스턴 셀틱스)
선수 : 밥 쿠지(6), KC 존스(8), 톰 하인손(8), 빌 러셀(11), 제리 루카스(1), 오스카 로벌슨(1), 밥 페팃(1), 톰 골라(1)
* 괄호안은 NBA 우승 횟수

전원이 은퇴 후 명예의 전당에 올랐던 이 팀은 1992년 드림팀 탄생 이전에 꾸려진 최상의 라인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무부 친선 투어팀'은 이집트,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를 돌며 경기를 치르고, 경기가 없는 날에는 농구 클리닉을 개최했다.

1960년대였기에 미국과 의 관계가 그리 가깝지 않은 나라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팀은 스포츠를 통한 외교를 위해 기획된 팀이라 할 수 있다.

4월에 시즌이 끝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이들은 6주간 유럽을 돌았다. 애초 계획은 4주였는데 워낙 현지 반응이 좋아 2주가 늘었다는 후문.

그 사이 치른 경기는 무려 19경기였다. 미국에서 원정을 갖는 것만으로도 힘들 터인데, 생소한 나라에서 6주간 경기를 치르니 진이 빠질 법도 했다.

그러나 페팃은 "우리는 드림팀 이전의 월드 클래스 팀이었다.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 없었다. 대부분의 경기를 주도했다. 내 농구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경험이기도 했다"라고 돌아봤다.

그 시기만 해도 농구 인프라가 잘 갖춰지지 않아 야외에서 경기를 할 때도 있었다.

페팃은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축구장에서 경기를 했다. 18,000명인가 들어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관중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뭔가를 던지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라고 돌아봤다.

원조 'Mr. 트리플더블' 오스카 로벌슨의 기고문에 따르면 '국무부 친선 투어팀'은 적게는 28점, 많게는 40~50점차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팃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유고슬라비아 경기 전 상황을 꼽았다.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를 앞둔 상황이었다. 당시 상대가 성조기만 게양하지 않았다. 우리 국가도 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레드 아워백 감독님은 우리를 다 불러 들이시고는 국가를 연주하지 않으면 경기를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주최측은 아워백의 요구를 들어줘야 했다."

한편 당시는 ESPN과 같은 스포츠 전문매체도 없었고 중계도 없었다. 애석하게도 자료 영상도 찾기가 힘들다. 또한 미국 민권법(civil rights act)가 제정된 직후였기에 여전히 흑인 선수들의 자유로운 영리 활동 및 인터뷰도 제한되어 있어 널리 알려지는데 한계가 있었다. 

오스카 로벌슨이 훗날 방송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통해 당시 분위기를 전하며 많이 알려졌다.

사진출처=명예의 전당

 

Copyright © 점프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