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서방국들 향해 '에너지 전쟁' 방아쇠를 당겼다
반격 준비하는 유럽..'치킨게임' 양상 속 승자는?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석 달 가까이 지속 중인 가운데, 유럽 대륙에서 우려하던 '에너지 전쟁'이 본격 시작한 것으로 관측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의 높은 대러 에너지 의존도를 약점잡아 공급 중단 위협으로 제재 완화를 노리고 있다.
이에 글로벌 유가와 유럽 가스 가격이 급등하고 있지만, 그간 푸틴의 '몽니'로 '맷집'이 다져진 유럽 국가들은 이번 기회에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을 아예 끊어낸다는 방침이다.
다만 에너지 부족을 당장 이번 여름에는 견뎌낼 수 있더라도,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겨울까지 지금의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구심도 제기된다.
미사일과 포·폭탄이 난무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해, 유럽 대륙 전역에서 발발한 '총성 없는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될지 주목된다.
◇러시아, '에너지 무기화' 시작했다
AFP 통신에 따르면 로버트 하벡 독일 경제장관은 12일(현지시간) "러시아가 기어이 에너지를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날 러시아가 벨라루스,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야말-유럽' 가스관의 폴란드와 독일 측 운영사 및 그 자회사에 무더기로 제재를 발표한 데 대한 반발이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일 '비우호적 국가의 기업과 단체, 개인 등에게 러시아산 제품과 원자재 수출을 금지한다'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신규 거래뿐만 아니라 기존 거래 의무 이행도 허용치 않는다고 규정, 가스 운송 관련 기존 계약도 파기할 수 있음을 시사했는데,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번 제재에 따라, 러시아산 천연가스 국외 수출을 독점하는 가스프롬은 이날 야말-유럽 가스관의 폴란드 구간 운용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폴란드 구간 파이프라인 소유주 '유로폴 가스'가 제재 대상이 됐기 때문인데, 함께 제재를 받은 '가스프롬 게르마니아'와 그 자회사까지 후속조치가 확대될 경우 피해 규모는 유럽을 넘어서게 된다.
가스프롬 게르마니아는 여러 자회사들을 통해 야말-유럽라인의 유럽 지역 최종 도착지인 독일에서 다른 국가들로 가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왔다. 원래 가스프롬의 독일 법인이었지만, 가스프롬이 지난달 돌연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독일 에너지 규제당국이 운영 중이다. 제재 대상에는 가스프롬 게르마니아의 자회사 29곳이 몽땅 포함됐다. 이들 자회사는 Δ스위스 Δ헝가리 Δ영국 Δ프랑스 Δ불가리아 Δ네덜란드 Δ벨리에 Δ룩셈부르크 Δ스위스 Δ루마니아 등 유럽 지역과, Δ미국 Δ싱가포르 등에서 운영됐다.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 천연가스 도매 기준 가격으로 꼽히는 네덜란드 TTF 선물은 이날 메가와트시(MW/h)당 106유로로 약 13% 급등했다. 전년 동기 가격 대비 4배가 넘는 수준이다.
전기요금도 올랐다. 독일의 전기료는 메가와트시 당 230유로를 상회하며 최고치를 기록했다.
러시아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조짐이다. 이날 핀란드 일간 일탈레흐티에 따르면 핀란드 주요 정치인들은 13일부터 러시아가 자국내 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레드라인'으로 여기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추진에 대한 보복 및 위협 조치로 풀이된다.
핀라드를 포함한 발트해 국가들은 다른 유럽 지역보다도 대러 가스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유럽 31개국 가스 전송사업자인 ENTSOG 측은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줄 경우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수요를 줄일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유럽 "이대론 안 당해…이 기회에 러 화석연료 끊고 에너지 전환 박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1세기 들어 유럽에 닥친 초유의 전쟁이지만,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는 유럽 국가들에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다.
유럽 각지로 다수의 가스관을 건설해오던 러시아는 서방과의 대립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공급 중단 위협을 가하는 '몽니'를 부려왔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이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대가를 묻기 위해 러시아에 가하는 제재가 장기화하다보면 오히려 유가 급등과 인플레이션 등으로 서방 지도자들이 먼저 나가 떨어질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유럽 지도자들은 이번 기회에 아예 러시아 에너지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고 Δ공급처 다변화 Δ재생에너지 전환 Δ에너지 사용량 감축에 속도를 낸다는 방침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오는 2027년까지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석탄 등 모든 화석연료 수입을 중단하고, 이를 대체할 재생에너지와 대체가스 공급 등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기 위해 195억 유로(약 26조 원)를 투입한다는 계획을 내주 중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어차피 에너지 전환은 EU가 주도해온 글로벌 어젠다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에 속도를 높여 2030년까지 달성할 기후 목표를 좀 더 야심차게 상향할 계획이다. 기존 40%였던 2030 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45%로, 에너지 소비량 자체 감축량은 9%에서 13%로 높인다.
이 밖에 청정수소 공급량도 2030년까지 자체 생산 1000만 톤, 수입 1000만 톤 등 총 2000만 톤을 조달하고,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처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나이지리아 등으로 다변화한다.
우크라이나 역시 지난 10일 자국을 경유해 유럽으로 러시아 가스를 실어나르던 '소흐라니브카' 가스관을 잠궈 버리는 선제 공격을 가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 천연가스 운송로의 가장 중요한 경유지로, 전쟁 중에도 가스관은 정상 운영해왔다.
이 같은 유럽의 강경 대응이 굳건하게 이어질 경우 러시아 경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 경제에서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60%가 넘고(러 연방소비청FCS 2017년 기준 63.2%), 그 최대 목적지가 유럽 국가다.
결국 유럽과 러시아의 에너지 전쟁은 '치킨게임'인 셈인데, 누가 먼저 물러날지, 타협안을 찾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우크라이나와 유럽 전역에서 발발한 두 가지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그 첫 시험대는 전력 수요가 높아지는 올겨울이 될 전망이다.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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