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딱 한 번 눈물

2022. 5. 1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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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의 『갈채와의 밀어』 다시 읽기㉕
▲고등학생 김영기

친구들은 김영기를 가리켜 ‘냉정한 사나이’라고 했다. 김영기는 이 말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으며 ‘체념이 빠른 면’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는 이겼을 때는 간결하게 기쁨을 느끼고, 졌을 때는 쉽게 잊는다. 끝난 경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경기 결과에 따라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극적으로 이겼다고 환호하거나 아깝게 졌다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플레이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을 기억하고 가다듬는 데 힘을 바칠 뿐이다.


스포츠 경기는 반드시 승부를 가린다. 싸우는 이상 이겨야 한다. 김영기는 이긴다는 사실에 조건을 하나 건다. 깨끗이 이겨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깨끗이 지느니만 못하다는 것이 김영기의 소신이다. 그래서 그는 ‘페어플레이’, ‘파인플레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기호는 평생을 간다. 그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중앙일보가 제정한 페어플레이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농구 종목에서는 전희철, 김훈, 주희정 등이 이 상을 받았다.) 분주한 김영기가 굳이 그 일을 떠맡은 데는 페어플레이에 대한 평생의 집념이 작동했을 것이다. 이런 의식이 체념이나 냉정함으로 나타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영기도 꼭 한 번 운 적이 있다. 너무나 분하고 안타까운 나머지 경기가 끝난 뒤 한참을 운 기억. 그의 농구선수 생활을 통틀어 유일한 눈물의 기억이다.

배재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봄철리그(『갈채와의 밀어』에는 ‘봄에 열리는 춘계 학생농구 리그’로 나온다.)와 초여름에 열리는 종별선수권대회가 공식대회 중에 가장 중요하고 컸다. 김영기는 배재고가 봄철리그에서 한양공고에 75-76으로, 종별대회에서 88-89로 졌다고 기록했다. 특히 두 번째 대결에서는 88-87로 앞선 가운데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골을 맞았다. 1점 차 리드를 지키기 위해 패스 플레이를 하다가 가로채기를 당한 것이다. 배재고 선수들은 모두 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겨우 정신을 수습해 응원석 앞에 갔을 때는 얼굴이 모두 눈물범벅이었다. 응원단장이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응원가를 불렀다. 노래가 아니고 악을 쓰는 것 같았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 이때 김영기도 뜨거운 눈물을 쏟고 말았다.

필자는 김영기를 울린 두 경기를 특정하기 위하여 당시 신문 보도와 대한민국농구협회에 남은 기록을 검색하여 보았다. 그러나 『갈채와의 밀어』의 기술과 일치하는 사례를 5월 13일 현재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김영기가 고등학교 3학년 때라면 1954년이다. 『갈채와의 밀어』에 나오는 대회명은 모호한 면이 있다. ‘봄에 열리는 춘계 학생농구 리그’가 무엇이었는지 알기는 어렵다. ‘초여름’에 열렸다는 종별대회는 1954년 6월 4일부터 9일까지 경복고등학교에서 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향신문의 1954년 6월 11일자 2면 기사에 따르면, 배재고는 9일에 열린 이 대회 결승에서 한양공고에 28-29로 졌다. 이 스코어는 김영기가 기록한 스코어와 큰 차이가 난다. 신문이 1골을 1점으로 잘못 계산해 보도했다고 가정하고 ‘곱하기 2’를 해도 56-58에 불과하다. 이 당시 고등학교 경기에서 70점, 80점대 득점이 나온 사례는 드물다. 사례가 있더라도 대개 강팀이 약한 팀을 일방적으로 공략해서 거두는 점수다. 양 팀이 모두 70점, 80점대를 기록하며 치고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주목할 점은 스코어뿐이 아니다. 김영기가 『갈채와의 밀어』에서 보여주는 문장과 표현능력이다. 그는 글을 잘 쓴다. 타고난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속에서 마주치는 글귀, 단어의 선택,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능력, 감정을 표현하거나 드러내는 방법 등에서 잘 훈련된 문장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선배 체육인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라는 일컬음이 무색하지 않다. 운동 실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지성과 교양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다. 김인건은 대단한 독서가로서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다. 방열은 글 솜씨가 뛰어나 신문 칼럼니스트로도 인기를 얻었고, 바쁜 가운데 집필한 저서가 12권에 이른다. 그가 정리한 여러 농구 이론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교과서로서 가치가 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학생 선수들의 운동과 공부를 양립할 수 없는 조건으로 인식한다. 선배 세대의 사례를 살펴 오늘날의 자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교육과 성장에 뜻을 두는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학생이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받을 권리를 어떻게 지켜줄 것인지 양심으로 고민하고 즉각 행동해야 한다.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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