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선자'의 이야기 <억울함을 발판 삼아>[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2. 5. 1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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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가 드라마화 되어, 다시금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파친코>의 선자는 재일동포 여성들을 대표하는 보편적인 인물이다. 시장에 선 선자의 얼굴, 익숙하지 않은 일본어로 손님들에게 “이랏샤이마세”를 외치는 강인함은 동포여성들의 족적이기도 하다. 드라마 <파친코> 제8화에는 동포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여기 한 여성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정화신이다. 1924년에 태어나, 1939년에 박인철과 결혼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왔다. 혼인 첫날밤에서야 박인철로부터 “이미 두 번 결혼한 적이 있었다”는 전력과 “지금 만나는 애인과 일본에 가서 돈을 벌 테니, 당신은 한국에 남아 농사를 도우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박인철이 결혼한 이유는 “제사를 지내고” 자신이 일본으로 간 후 “대신 농사를 지어주고 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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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애인을 제치고 남편과 동경하던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염전에서의 가혹한 노동과 석탄으로 뒤덮인 지붕도 제대로 없는 차디찬 방 한 칸이었다. 박인철은 “일본 여자랑 결혼을 해야 신용이 생겨서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다”며 일본 여자와 결혼해 사업할 꿈을 꾼다. 그러는 사이 정화신은 “신용만이 살 길”이라며 염전에서 묵묵히 일하고, 염전일이 없을 때는 모내기를 돕고 수확도 함께하며 돈을 벌고 쌀도 받아온다.

2년간의 염전 노동 계약이 끝난 후에는 농가의 단칸방을 얻어 살며 농사를 도와 받은 쌀로 엿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다. 밤낮없이 일을 해 쌀엿까지 만들어 팔 정도로 수완이 좋은 정화신은 온갖 노동을 하며 아이를 다섯이나 낳아 키운다. 남편 박인철은 변함이 없다. 아내가 잘못을 하면 “바보 멍충이!”라고 화를 내고, 엿장수가 궤도에 오르자 보란 듯이 양복을 빼 입고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

둘째딸로 태어난 정화신은 딸만 많은 집안에서 딸이라 버려진 자신의 동생들을 키우고,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지만 아버지는 항상 “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데”하며 안타까워한다.

정화신은 여자라는 이유로 태어난 직후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으며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혹독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먹고살기 위해 전쟁 당시에는 논밭에 나가 돈을 벌어 엿장수를 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고철을 주워와 팔아 성공을 거두었고 파친코도 경영하게 된다.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쓸 수 없는 것이 답답해 독학으로 한글을 배우고, 일본어도 생활을 통해 차근차근 익혀 나간다. 청구서나 영수증을 쓸 수 있어야 사업을 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을 다른 여자에게 가져다주고, 딴살림을 차리고, 도박에 빠져 지내는 박인철은 아이들과도 별다른 유대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정화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 아들 박성철씨의 협력으로 펼쳐낸 한 권이다. 정화신 할머니는 이 책이 발간되기 전인 작년 5월 만 9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드라마 <파친코>의 수 휴 총괄프로듀서는 어느 인터뷰에서 “재일동포의 삶은 역사책에 쓰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나 여성들의 삶은 더욱 그렇다. 일본 내에서도 주목받기가 힘들었고 재일동포사회에서도 설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아내 또는 엄마로서 남편과 아이들과 남성들이 중심이 된 동포들의 다양한 활동을 서포트하는 자리에만 서 왔다. <파친코>의 선자처럼 모두가 강인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 테지만, 어찌되었든 꼭 쓰이고 읽히고 전해져야 할 이야기가 있다. 정화신 할머니의 이야기도 그렇다.


김민정 재일 작가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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