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집으로 돌아온 '실버 취준생 분투기' 작가 이순자 씨의 삶

정재우 기자 2022. 5. 1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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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살 넘어도 계속되는 삶..한데 모여 책으로

'실버 취준생 분투기' 기억하시나요.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인 이 글은 안전망 없는 노인의 삶을 알려 독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수상 한 달 만인 지난해 8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사연이 안타까움을 더했는데, 고 이순자(1953~2021) 작가의 유고집 두 권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유족들이 한데 모은 글이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와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로 출간됐습니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예순두 살인 작가가 황혼 이혼 후 취업하면서 겪은 일을 담담히 담아냈습니다. 문예 창작을 전공했고, 수십 년 호스피스 봉사 활동을 했고, 상담 치료 자격증까지 있지만 '단순 노동을 할 수 있느냐'는 동사무소 직원의 질문과 환갑이 넘은 나이 앞에 경력을 다 지워 버립니다. 청소부터 아이 돌보기, 요양보호사까지 많은 일을 이어가면서도 글쓰기의 꿈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글이 공개된 페이지의 누적 조회 수는 16만 8천회를 넘겼습니다. "씁쓸했다가 화도 났다가…공감하며 읽었다""하루 한 끼만 먹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느낄 수 있었다"며 작가 이순자의 '건필'을 응원했습니다.

이순자 작가 유고집 〈자료제공=휴머니스트〉

그런데 책은 가장 유명한 이 글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산문집의 제목은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로 정해졌습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출판사 이문경 편집자의 말입니다.

대표작을 두고 낯선 제목을 택한 이유는
그 나이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함 같은 것들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의 평소 성품이 드러날 수 있는 제목으로 고민했습니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에서 사람들은 주로 가난이나 죽음을 봤는데, 그 삶 자체가 주목받기를 바랐습니다.

꽃 중에서도 왜 '깨꽃'이었을까.
작가님께서 시골 생활을 해보겠다고 강원도 평창에 집을 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금세 정이 들어 버린 이웃 할머니가 집 앞에 날아든 깨 꽃을 보더니 "이게 똑 너 닮았다" 말하는 부분이 있어요.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깨꽃이 흙도 없는 은행나무 그루터기에 피었는데요. 예순 살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생명력, 깨꽃처럼 다시 예순 살에 핀 것 같다는 의미라고 느꼈어요. 60대 이후의 삶과 잘 어우러지는 것 같아서 그 문구를 제목에 썼습니다.

글을 보면서 이순자 작가는 어떤 분이라고 느끼셨나요.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셨던 분. 자신에게는 철저했지만, 타인에게는 연민을 보여줬고, 미화하거나 함부로 과소평가하지 않으셨어요.

작가가 직접 책을 볼 수 없어 어려운 점도 있었을 텐데.
최대한 선생님의 고유한 이야기들이 정확한 문장으로 만들어지도록 했습니다. 따님이 작가님의 평소 말투를 떠올리며 어머니가 많이 쓰셨을 것 같은 단어를 골라줬고, 동문 분들도 함께 빈자리를 메워줬습니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잊히기 전에 빨리 책이 전해졌으면 했습니다.

'무늬만 천사'라는 글에서 작가는 자신의 나이를 돌아봅니다. "예순이 넘으면 순해져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나는 바보도, 천사도, 무늬만 천사도 아닌 그냥 나, 이순자다. 사람들이 나를 나로 인정해 주면 좋겠다."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키려는 모습부터 모든 독자가 공감할 것 같습니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에 관심이 쏟아지자 가족들은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자극적으로 편집될까 봐 조심스러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힘든 삶에도 작가의 글을 통해 내 삶을 돌아봤다'는 댓글에 용기를 얻어 작가 이순자를 세상에 선보이게 됐습니다.

제16회 전국장애인문학제 시상식 인터뷰

책에는 전국장애인문학제 대상 작품인 '순분할매 바람났네'도 수록돼 있습니다. 열일곱에 시집와 남편을 잃고 '씨받이'를 해야 했지만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은 순분 할머니와의 추억을 담은 글입니다. 대상 수상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작가는 "청각장애인들은 내가 무슨 뜻을 전달하고 싶을 때 대처를 잘 못 하잖아요. '이 사람이 어떤 마음일까?' 하는 생각을 보통 사람보다 많이 해요"라며 '공감의 글쓰기' 비법을 털어놓았습니다.

책이 세상에 나온 덕분에, 이순자 씨는 그저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고생한 노인'이 아니라 평생 이웃의 삶에 귀 기울인 연민 많은 작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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