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 "잔혹한 공포, '전설의 고향'서 영향받았죠"

이은정 2022. 5. 1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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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서워서 가기 싫어요. 비행기 타기 전엔 이유 없이 무섭거든요. 제가 집고양이 체질이라 영역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세계적인 권위의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46) 작가는 오는 26일(현지시간) 수상자 발표 즈음해 런던행 비행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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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발표 부커상 최종후보.."현실이 호러, 스티븐 킹 소설서 배워"
집회현장 지켜온 '투쟁하는 소설가'.."거짓말 짓는 것, 상실 기록하기 위한 타협안"
최고 권위 문학상 '부커상' 후보 정보라 작가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 취하고 있다. 정보라의 '저주 토끼'(Cursed Bunny)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에 포함됐다. 2022.5.13 mjkang@yna.co.kr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너무 무서워서 가기 싫어요. 비행기 타기 전엔 이유 없이 무섭거든요. 제가 집고양이 체질이라 영역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세계적인 권위의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46) 작가는 오는 26일(현지시간) 수상자 발표 즈음해 런던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만난 정 작가는 "곧 런던에 갈 텐데, 주위 기대감에 부담될 것 같다"고 하자 엉뚱한 표정을 지으며 예상치 못한 답변을 했다.

그는 "영국에서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거나, 2차 저작물 관련 출판사들과 만날 것 같다"면서도 혼잣말처럼 "제가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님과 같은 선상에 갈 만한 사람이 아닌데…"라고 자신을 낮췄다.

정 작가는 지난 3월 부커상 '롱리스트'(1차 후보)에 선정된 뒤부터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무명에 가까웠던 그의 작품은 날개를 달았다. 부커상 후보작인 소설집 '저주토끼'(아작)는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인도, 프랑스, 대만 등 18개국에 판권이 판매됐다.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와 장편 '붉은 칼'(이상 아작) 등 다른 전작들과 그가 정도경이란 필명으로 쓴 소설을 찾는 독자도 늘었다.

거리에서 '투쟁하는 작가'란 행보가 주목받기도 했다. "글도 써야 하는데 주로 데모를 하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세월호 천막을 지켰고, 차별금지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오체투지를 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집회에 나서는 등 시선을 둔 곳도 다양하다.

데모하다 만난 포항 남자와 지난 2020년 결혼해 그곳에 사는 정 작가는 전날 상경해 인터뷰 일정을 소화했다. 원고 청탁과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을 뿐, 그의 일상이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홀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다음은 정 작가와의 일문일답.

문학상 '부커상' 후보 정보라 작가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 취하고 있다. 정보라의 '저주 토끼'(Cursed Bunny)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에 포함됐다. 2022.5.13 mjkang@yna.co.kr

-- 정식 등단 절차를 밟지 않은 작가여서 정보라의 '발견'처럼 여겨진다.

▲ 등단이 입시처럼 생각됐다. 문예창작과나 국문과에서 한국어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소설을 일반 문예지에 보낸 적이 있는데 수정을 요구해왔다. 어떻게 수정하란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당시 유학 중이라 한국에서 등단해 작가가 되는 게 1차 목표가 아니어서 그만뒀다.

-- 작품 활동 시작점은.

▲ 번역가로는 2003년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 작품 2권을 번역 출간한 게 처음이었다. 작가로 종이책을 처음 낸 건 2008년 계간 '판타스틱'에 낸 단편 '죽은 팥'이다. 2008년 디지털문학상(중단편 가작)과 2014년 SF어워드(중단편 우수상)에서 상을 받은 적은 있다.

-- 소감마다 부커상 최종후보에 함께 오른 폴란드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를 언급하던데.

▲ 토카르추크 작가의 '낮의 집 밤의 집'을 번역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러시아 문학 하면 도스토옙스키나 레프 톨스토이의 극사실주의 작품을 주로 떠올리는데, 환상과 현실, 신화, 전설, 역사 모든 걸 뒤섞었는데도 기묘한 방식으로 작품이 완결된 걸 보면서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토카르추크 작가에게 뭔가를 배우러 간다고 해도 영광일 텐데, 같은 자리에서 후보라니….

부커상 최종후보 정보라 기자간담회 (서울=연합뉴스) 소설집 '저주 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있다. 2022.4.14 [재판매 및 DB금지] photo@yna.co.kr

--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슬라브 문학에 관심을 둔 계기가 있나.

▲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확 올라갈 때 저도 그 물결을 타고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게 됐다. 단순하게는 러시아 글자를 읽고 싶었다. 인문학부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으로 택했는데, 톨스토이 너머에 광활한 세계가 있더라. 러시아 하면 꼽히는 명작이 대부분 19세기 작품인데, 20세기 문학은 또 다르고, 20세기 소비에트 문학은 또 완전히 달랐다.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로 박사 논문을 썼는데, 그의 작품 중 '구덩이'를 좋아한다.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 슬라브 문학이 SF 장르를 쓰는 데 영향을 줬나.

▲ 러시아나 폴란드 등 동유럽 문학 전체가 새로운 체제를 소설 안에서 구현하면, 사회과학적인 과학 소설도 자연과학적인 과학 소설처럼 SF로 분류한다. SF 정의에 대한 정립된 이론은 없는데, 사회주의 국가일수록 SF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우주비행사를 보내는 소련이 (국민에게) 이렇게 과학적이고 기술이 발달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주입하기에 SF는 편리한 장르다. 직접적인 관심은 '씨앗'으로 SF어워드를 수상했을 때다. 농업 생태와 환경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화가 나서 쓴 단편이어서 'SF가 뭐지?' 하고 궁금해졌다.

-- 작품을 보면 SF이면서 호러의 색채가 강하다. '저주토끼'에선 저주토끼가 아이의 뇌를 갉아먹고(표제작), 오빠가 쌍둥이 여동생의 피를 빨아먹는('덫') 등 인간의 폭력성에 복수하는 서사가 섬뜩하다. 기발한 발상은 어디에서 얻나.

▲ '저주토끼' 단편들에 영향을 준 건 (공포 사극) '전설의 고향'이다. 추리소설 취향을 가진 외할머니가 '전설의 고향'을 꼭 불러서 같이 보셨다. 집에는 동화책이 많았고, 어린이 삼국유사·삼국사기도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이편'이 진짜 재미있었는데, 비현실적이면서 무섭기도 하면서 재미있고 신기한 여러 느낌을 한꺼번에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기술하는 게 좋았다. '저주토끼'는 한국과 일본, 중국의 괴담이나 도시 전설 같은 방식으로 써보고 싶었고, 제일 쉽게 무서울 수 있는 게 복수였다.

-- 복수 코드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대한 비판인가.

▲ 약자의 편은 맞는데, 현실 호러가 벌어지니 마음 편하게 대박 무서운 얘기를 쓰고 싶었을 뿐이다. 스티븐 킹 소설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는 초기작에서 청소년, 임신한 여성 등 약자나 취약한 주인공을 내세운 호러를 정말 잘 썼다. 주인공이 성인 남성이라면 무섭지 않을 이야기가 임신한 여성이어서 무서워지는 상황들이 있다. 약자가 위협받게 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를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 '저주토끼'가 환상성에 기반을 뒀다면, 지난해 출간한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는 현실과 연결고리가 있다. 표제작은 모든 차별이 금지된 미래, 120세 여성이 팬 미팅에 갔다가 폭탄 테러에 휩쓸리는 얘기다. 투쟁의 소회가 직접적으로 담겼고 군 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해 강제 전역당한 뒤 세상을 떠난 "변희수 하사를 기억합니다"라고 끝맺는다. 이 책 작가의 말에는 "상실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애도"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 표제작은 언젠가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썼다. SF 장르에선 미래에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원하는 걸 담아 쓰는 게 가능하다. 다른 작가분들 중에선 피해자를 인터뷰하며 사실을 기록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거짓말을 만들고 있는 거다. 제 나름으로는 피해자들에게 피해를 드리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고, 기록은 해야겠기에 일종의 타협안을 찾은 거다.

-- 투쟁이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치나.

▲ (데모를) 좋게 보지 않는 시선도 있어서, 소설 쓰는 정보라와 데모하는 정보라를 분리하려 노력했다. 인권을 위해 활동한다고 떠벌리는 게 좋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시기가 지나면서 이젠 이런 얘길 내놓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데모 경력이 길진 않은데, 집회 현장에 나가면 강렬한 얘길 듣거나 겪게 된다. 그런 걸 소설로 쓰고 싶어졌다. 세월호 1주기 때 광화문 현판 밑에서 부모님들과 손잡고 있으면서 우릴 둘러싼 경찰, 차벽을 보면서 전쟁 소설을 쓰면 공성전(성이나 요새를 빼앗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 장면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장편 '붉은 칼'을 썼다. 집회에서 들은 얘기나 본 것들은 제 마음에 정말 깊이 박힌다. 데모하기 전에는 늑대 인간과 달걀귀신이 연애하는 '문이 열렸다' 같은 보드라운 사랑 얘기도 썼다. '붉은 칼'에도 성 소수자 커플이 나오는데, 사랑에 죽고 사는 순정파다.

부커상 최종 후보 포함된 정보라 작가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 취하고 있다. 정보라의 '저주 토끼'(Cursed Bunny)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6편에 포함됐다. 2022.5.13 mjkang@yna.co.kr

-- 현재 김초엽, 정세랑, 천선란 등이 회원인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이다. 어떤 일을 하나.

▲ SF 작가들의 지면을 확보하는 것이다. 계간 '판타스틱'처럼 지면이 있었는데 사라지거나 디지털문학상처럼 국가에서 상을 마련했는데 엎어지거나 변동이 심하다. 안정적으로 작가가 창작을 이어가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지면을 적극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구독 플랫폼이나 종이책 출판사에 이런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고 있다고 열심히 홍보한다.

-- '저주토끼' 판권이 해외에 계속 팔리고 있고 콜롬비아에서도 작품집이 나오는데,

▲ 콜롬비아에서는 '그녀를 만나다' 가운데 '여행의 끝', '아주 보통의 결혼', '마리아, 그라티아 플레나'(Maria, Gratia Plena) 등 4편과 예전 작품집 중 판타지 동화 같은 3부작을 같이 묶어서 스페인어로 나올 예정이다. 또 경주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이주 노동자 영어 통역을 했었는데, 외계인 노동자가 지구에 와서 공존하는 얘기를 한 잡지에 게재할 예정이다. 공장에 귀신이 나타나서 외계인의 방식으로 귀신을 처치하는 얘기다. (웃음)

mim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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