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다듬는 '이발소' 깎사 시인
37년 교직 그만두고 이발소 열어
시골 버스 무대 연작시집 계획
세상 만물 시로 쓴 '정록사전'도
그럴 때가 있다
이정록 지음 l 창비 l 1만원
이정록 시인이 이발사로 변신했다. 37년 동안 교사로 일하다가 지난 2월 말로 퇴직한 그가 충남 천안 시내의 한 아트센터 건물에 이발소를 열었다. ‘이정록 시인의 이발소: 이야기발명연구소’가 그 공간의 이름이고, 그가 새로 판 명함에 적힌 직함은 ‘깎사’. 이발사를 뜻하는 군인들의 은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죠. 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겠다는 겁니다. 바깥에서 다른 일정이 없으면 매일 이발소에 나가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강연도 준비하고 다른 분야 예술가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발명’하는 거죠.”
신작 시집 <그럴 때가 있다>를 낸 이정록 시인을 11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명예퇴직을 하고 전업 작가가 된 그는 “공문과 결재가 없는 삶이 정말 행복하다”면서도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일은 더 많아진 것 같다”며 웃었다. 그가 자유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문학상 심사며 강연 같은 요청들이 몰려드는데다, 퇴직 뒤에 혹시도 있을지 모르는 슬럼프를 걱정해서 출판사에 미리 넘겨둔 책 원고가 무려 일곱 권 분량에 이른다고! 신작 시집에 이어 가을에는 동시집과 그림책도 나올 예정이다.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 //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그럴 때가 있다’ 부분)
표제작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이다. 무심코 지나칠 법한 일상의 짧은 순간을 날렵하게 포착해 심장한 의미를 부여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 공감과 연대의 다리를 놓는 시야가 넉넉하고 듬직하다. “지켜준다는 건 조용하게/ 뒤편에 있어준다는 것이다”(‘뒤편의 힘’), “함께 울어줄 곳을 숨겨두지 않고/ 어찌 글쟁이를 할 수 있으리오”(‘빌뱅이 언덕’) 같은 구절들 역시 표제작의 정신에 이어진다.
아프고 슬픈 일들이 많은 세상이라 시집에도 울음과 눈물이 흥건하다. “노래는/ 들이마시는 울음이라고”(‘몽돌해수욕장에서’) 몽돌해수욕장의 모난 돌은 말한다. 바닷가 분교에 강연을 간 시인에게 할머니 손에서 자라는 아이가 토막 연필 하나를 내밀며 말한다. “이걸로 재미난 글을 써주세요.” 연필을 받으며 다시 어린 학생이 된 시인은 “선생님, 잘 쓰겠습니다” 다짐하고는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운다.(‘꼬마 선생님’)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이정록 시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웃음이 이런 울음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일이다. 특히 시골 버스 기사와 할머니 사이의 유쾌한 대거리는 이정록 득의의 ‘장르’라 해도 손색이 없으리라. ‘파리’ ‘짐-어머니학교 6’ ‘청양행 버스 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 같은 앞선 시들에 이어 이번 시집에 실린 ‘팔순’ 역시 그 장르로 분류할 수 있다.
“기사 양반, 잘 지내셨남?/ 무릎 수술한 사이에/ 버스가 많이 컸네./ 북망산보다 높구먼.”
무릎 수술을 하고 오랜만에 버스에 타는 할머니의 말이다. 이에 기사는 검버섯 핀 할머니의 얼굴을 가리켜 “여드름이 거뭇거뭇 잘 익은 걸 보니께/ 서른은 넘었쥬?”라며 받는다. “민증은 집에 두고 왔는디/ 골다공증이라도 보여줄까?”라는 할머니와 “성장판 수술했다맨서유”라 대꾸하는 기사의 대거리는 점점 농익어 가고 해학과 음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이정록 시인은 시골 할머니와 버스 기사의 유쾌한 대거리를 담은 연작시 50~60편을 써서 아예 책 한 권을 낼 계획이라고 11일 인터뷰에서 소개했다.
“시골 버스를 보면 일단 성비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요. 남자 어르신들은 일이 있으면 트럭이나 승용차를 직접 몰고 다니는데, 나이 많은 어머님들은 버스를 이용하거든요. 학생들 말고는 버스 안에서 가장 젊고 건장한 남자가 버스 기사인데, 어머님들이 이 기사를 상대로 이물없이(허물없이) 농담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죠. 지나온 인생이며 자식 얘기, 농사일, 수입 농산물, 농협 빚, 환경, 정치, 노령화 문제 등 온갖 얘기가 나오겠죠. 이걸 연극이나 낭독극으로 만들어서 마을마다 다니며 공연을 해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버스 기사 역할을 하고 마을 분들이 작품 속 할머니 역할을 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예요. 이 땅의 구술 문화와 해학성이 마지막으로 집중된 현장이 될 겁니다.”
그가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라는 산문집을 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는 버스가 시를 위한 영감과 취재의 현장인 셈이다.
<동심언어사전>이라는 사전 형식 시집을 낸 바 있는 그는 또 ‘정록사전’(가제)이라는 두툼한 사전 시집 역시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령 국어사전이나 식물사전에 설명된 감나무는 모두 같지만, 사람들마다 감나무에 얽힌 추억은 다 다르거든요. 마찬가지로 돌이든 별이든 이 세상 모든 말들은 사람들 각자에게 서로 다른 기억과 감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이정록의 이야기와 감수성이 들어 있는 시 사전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제가 만든 사전에다가 다른 분들은 또 그분들 나름의 추억과 감성을 담아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 수 있겠죠.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하는 놀이나 글쓰기 프로그램 역시 ‘이발소’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발소가 들어가 있는 아트센터의 다른 분야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삶이 예술적으로 풍부해졌을 뿐만 아니라 글에 대한 생각 역시 바뀌었다고 말했다. “시를 쓰면서 노래로 만들거나 무대에서 공연으로 올려질 걸 염두에 두어야겠다, 활자라는 평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고 이발소 ‘깎사’는 힘주어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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