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확인, 가장 적극적인 책임

한겨레 2022. 5. 1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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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한겨레Book] 홍승은의 소란한 문장들
수신 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l 오월의봄(2013)

‘ 아 - 아 , 아아 -’ 벽 안에서는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마이크 테스트가 한창이다 . 의미 없는 소리를 뚫고 뚜렷한 목소리가 들린다 . “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 5 월 5 일 어린이날 , 동료들과 나는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농성장에 갔다 . 10 분만 서 있어도 이마가 붉게 달아오르는 5 월의 오후 1 시 , 60 여명의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였다 . 각자 적은 피켓을 옆에 낀 채 국회 벽을 둘러싸고 앉았다 . 차별을 금지하라는 상식이 법제화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벽에 막혀 있다 . 더는 미룰 수 없어 시작한 게 단식 농성이었다 .

그날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과 기후위기 행동 멸종반란 , 무속인 정의연대 굿판 등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함께했다 . 두 시간의 단식 행동이 끝나고 농성장 앞에는 벌겋게 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모였다 . 발언 시간이 이어졌다 . ‘ 이 순간도 기댈 곳 없는 청소년 성소수자가 있습니다 .’ ‘ 차별을 먹고 자라는 성장주의에 제동을 걸어 기후 위기를 해결합시다 .’ 25 일째 단식 중인 미류는 말했다 . “ 지금 벽 안에는 수많은 언론사가 와 있습니다 . 우리는 계속 말하는데 , 누구도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 그래서 더 말해야 합니다 .” 벽을 사이에 두고 경청과 존중의 태도가 갈린다 . 이 모습이 차별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 누군가 목숨을 걸고 외쳐야 하는 권리가 누구에게는 쉽게 음소거할 수 있는 선택이 되는 것 .

이 말들을 새겨들어야 할 정치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그들은 어쩌면 너무 많은 이해관계와 계산에 익숙해져 수신하는 법을 잊은 줄도 모른다 . 그렇게 생각하니 오래전 출간된 책을 추천하고 싶었다 .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엮은 < 수신 확인 , 차별이 내게로 왔다 >는 2013 년 4 월 출간된 책이다 . 책을 엮은 사람 중에는 국회 앞에서 단식 중인 미류도 있다 . 책이 나온 2013 년에도 , 2007 년에도 차별금지법안 발의 요구가 있었다 .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는 10 년도 훨씬 넘은 오랜 요구다 .

책에는 아홉개의 편지가 담겨 있다 . 증언이나 수필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 당신이 읽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쓴 글은 편지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린다 . 승민 , 혜숙 , 수민 , 정현 , 타파 , 이숙 , 민우 , 서윤 , 명희 , 영석 , 영은 . 이들은 미혼모 , 트랜스젠더 , 레즈비언 , 장애인 , 비정규직 , 결혼이주여성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알게 된다 . 차별받는 이가 왜 가난해지는지 , 어떻게 고용 불안정과 연결되는지 , 어떻게 폭력에 노출되는지 . 차별이 차별을 낳는 시스템을 알 수 있다 . 그 시스템이 단지 ‘ 그들 ’ 이 아닌 , ‘ 우리 ’ 가 속한 세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그러니까 차별금지법이 왜 당신과 나 , 우리를 위한 법인지 우리는 아홉명의 편지 덕분에 알 수 있다 .

책에는 편지의 최초 수신자인 활동가들의 글도 실려 있다 . “ 누군가 나에게 전언을 보낼 때 나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 이것이 윤리적 주체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전언이 나를 향한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하고 , 가능한 제대로 이해하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책을 통해 나는 배웠다 . 몸으로 쓰는 증언을 적극적으로 듣는 법을 . 수신한 자의 책임을 . 망설이는 당신에게 나는 이 책을 건네고 싶다 . 권리 앞에서 이해관계는 내려놓자고 . 우리 앞에 도착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책임지자고 .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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