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어딘가 숨어있을 교우들, 믿음 자라고 있을 거라 확신”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2. 5. 13. 03: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북한 교회 이야기’ 낸 천주교 최고령 98세 윤공희 대주교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을 지낸 윤공희 대주교. 은퇴 후 전남 나주 광주가톨릭대 구내 주교관에서 생활하고 있는 윤 대주교는 최근 '북한 교회 이야기'를 구술해 펴냈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주께서 부르시니, 또 주께서 행하심과 같이, 또 수많은 순교자와 같이 형장으로 나가야 한다. 이제 나 없는 이 자리를 너희에게 부탁하니 물러가 편히 쉬어라. 천당에서 만나자.”

1949년 5월 9일 한밤중, 함경남도 원산 인근 덕원수도원엔 때아닌 비상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독일 출신 백발의 사우어 주교 아빠스(대수도원장)는 갑자기 들이닥친 공산군에게 끌려가며 수도자와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5월 13일엔 신학생 73명과 수사 26명이 성물(聖物)과 수도복, 묵주는 물론 책 한 권도 챙기지 못하고 쫓겨났다.

당시 신학생으로서 덕원수도원과 신학교의 최후를 지켜본 윤공희(尹恭熙·98) 대주교가 최근 ‘북한 교회 이야기’ 를 펴냈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소장 강주석 신부)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 구술사 채록’ 프로젝트를 통해 작년에 8차례 인터뷰를 갖고 작가 권은정씨가 글로 풀었다.

윤공희 대주교의 구술을 정리해 발간된 '북한 교회 이야기' 표지.

윤 대주교는 1924년 평남 진남포의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나 덕원신학교에서 사제의 꿈을 키웠다.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 서울 성신학교(현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50년 3월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유학 후 1963년 초대 수원교구장을 지냈고 1973년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돼 2000년 은퇴했다.

월남하기 전 시기에 집중한 이 책은 거의 1세기를 살아온 최고령 주교만이 전할 수 있는 귀한 증언이 많다.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약을 나눠주고 학교를 세우며 선교하던 모습, 가난한 신자들이 열정적으로 성당을 짓는 장면 등이 펼쳐진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가 세운 서울과 대구 신학교의 엄격함과 달리 독일 베네딕도회가 세운 덕원신학교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지학순(1921~1993)·김남수(1922~2002) 주교 등이 덕원에서 함께 공부했다. 해방을 맞은 건 철학과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는 “그날 해방의 기쁨을 알려줄 종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전쟁 막바지 일제가 모든 쇠붙이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윤공희 대주교가 어린 시절 다녔던 진남포성당의 1933년 축성식 후 기념 사진.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이후 메리놀회의 북한 지역 성당 건축 모델이 됐다. /천주교 평양교구 사무국

“해방의 기쁨은 정말 잠시였다.”(153쪽) 공산 치하의 신학교와 수도원은 일제강점기 못지않은 탄압을 받았다. 해방되자 평양 신자들은 ‘우리 성전은 우리 손으로!’라는 구호 아래 관후리성당을 서울 명동성당보다 크게 짓겠다며 정성을 모았고, 그해에 평양에서만 1000명 넘게 세례자가 나왔다. 그러나 공산 정권의 탄압은 조직적이고 지속적이었다. 1946년 3월 수도원의 목공소, 농장, 인쇄소와 논밭 몰수를 시작으로 각종 공산당 조직 가입을 강요했고 마침내 1949년 5월 수도원과 신학교를 폐쇄했다. 1933년부터 1948년까지 사제 60명을 길러낸 덕원신학교와 수도원은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덕원수도원 성당. 평양, 함흥, 연길 교구 신학생을 사제로 길러낸 덕원신학교와 수도원은 1949년 5월 공산당에 의해 폐쇄됐다. /천주교 평양교구 사무국

지 다니엘(지학순) 신학생과 함께한 목숨을 건 북한 탈출 과정은 처절하고 드라마틱하다. 천신만고 끝에 남쪽으로 내려온 1950년 1월 17일,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선 행상이 “초코렛(초콜릿) 사시오. 미루꾸(밀크)도 있어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윤 대주교는 “그것이 바로 자유의 목소리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내 6·25가 터졌다. 전쟁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윤 대주교는 1950년 6월 28일부터 사흘간 가장 많은 고해성사를 준 것 같다고 말한다. 북한 감옥에서 순교한 덕원수도원장 사우어 주교의 무덤을 평양에서 확인한 건 9·28 수복 후 북진(北進)할 때였다. 평양에 있던 덕원수도원 수도자들이 공동묘지에 매장된 시신 중에서 ‘흰 수염’과 ‘세탁표 번호’를 보고 확인해 이장(移葬)해 놓은 묘지였다.

1944년 일제의 징병검사를 받은 후 동료 신학생들과 금강산으로 나들이한 윤공희 신학생(위에서 둘째 줄 오른쪽 끝). /천주교 평양교구 사무국

분단 후 윤 대주교도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지학순 주교가 평양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누이동생을 만난 1985년이었다. 당시 윤 대주교에게도 제의가 왔으나 거절했다.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아왔을지 모를 가족이 피해를 볼까 걱정했기 때문.

윤 대주교는 책 마지막에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는 것밖에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올해도 가지마다 새싹을 피울 덕원신학교의 나무들을 떠올리며 “북한 지역 어디에선가 숨어 있을 교우들의 믿음도 그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적었다.

윤 대주교는 책 발간에 대해 “오래전부터 가졌던 한 가지 소원이 이뤄졌다. 이제 남은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며 “독자들이 남과 북이 하나 되는 날을 기대하며, 한마음이 될 수 있기를 빈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