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얇아진 일본… 명품거리에 ‘300엔숍’이 생겼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2. 5.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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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은 그대로인데, 물가 폭등… 20년만의 최악 ‘엔저’가 바꾼 삶
지난 9일 일본 도쿄 긴자의‘스리코인숍’에서 손님들이 생활용품을 둘러보고 있다. 100엔짜리 동전 3개로 중저가 생활용품을 살 수 있는 초저가 매장으로, 엔저 여파로 생활 물가가 치솟으면서 최근 명품 매장으로 이름난 긴자 거리에도 진출했다. /최원국 특파원

9일 오후 일본 도쿄의 번화가 긴자(銀座)의 ‘스리코인숍’에선 20~30대 여성 수십 명이 중저가 생활용품을 쇼핑하고 있었다. 지난달 27일 문을 연 이곳은 ‘100엔짜리 3개’라는 매장 이름처럼 그릇과 옷걸이 등 대부분 상품 가격이 300엔(약 2900원) 균일가였다.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등 명품숍이 즐비한 긴자에는 어울리지 않는 초저가 매장이지만, 얄팍한 지갑 사정 때문에 가성비를 찾는 직장인과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매장에서 만난 미야다(25)씨는 “집에서 쓸 그릇과 컵을 구입하려 퇴근길에 들렀다”며 “무엇보다 가격이 싸 자주 올 것 같다”고 말했다.

뉴욕 5번가 못지않은 명품 거리인 긴자에 최근 중저가 상품 매장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100엔 숍’ 다이소가 지난달 15일 1645㎡(약 500평) 규모의 대형 점포를 열었고, 27일과 28일에는 스리코인숍과 저가 여성 의류 매장인 워크맨죠시가 긴자에 처음 등장했다. 워크맨죠시 관계자는 “긴자 매장에서 연 매출 5억~6억엔을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실패 확률은 제로”라고 자신했다.

일본 엔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뜻하는 ‘엔저(円低)’ 시대가 일본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고 있다. 올 초만 해도 1달러당 110엔 수준이었지만, 최근 130엔을 돌파하면서 해외 수입 상품을 중심으로 가격이 일제히 뛰었다. 실제로 식빵과 캔맥주, 전기요금, 목욕탕 이용료 등 실생활 물가는 지난 2월 이후 두세달 만에 5~20%씩 급등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와 곡물 가격이 치솟는 가운데 엔화의 구매력 하락이 맞물린 탓이다. 아사히맥주는 15년 만에 캔맥주 가격 10% 인상안을 발표했고, 일본 최대 회전초밥 브랜드는 38년간 고수했던 ‘한 접시 100엔’ 정책을 포기하고 가격을 올리기로 했다.

들썩이는 부동산 가격도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도쿄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지난해 6260만엔(약 6억2300만원)으로, 거품 경제 시절인 1980년대를 넘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30년 만의 물가 상승으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지만, 일본 직장인들의 주머니 사정은 그대로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 대졸 직원 평균 초임은 월 22만5400엔(약 225만원)이다. 고졸 직장인은 17만9700엔(약 179만원)에 불과하다. 일본인의 평균 수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국 가운데 22위에 그쳤다. 한국(19위)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물가 상승률이 제로(0)인 상황이 지속돼 낮은 임금 수준에도 버틸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일 저녁 도쿄 아키하바라의 초저가 술집 ‘미라이자카’ 입구에는 ‘생맥주 299엔, 하이볼 199엔’이라는 가격표가 가게 상호보다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미라이자카와 같은 저가 술집은 20대는 물론이고 주머니 사정이 안 좋은 30~40대 직장인까지 파고들고 있다. 일반 술집에서 2~4명이 마시면 1만~2만엔을 내야 하지만, 이곳에선 5000엔 정도면 가능하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유럽·동남아 등 각국에서 배달 음식이 대유행이지만, 일본은 상대적으로 잠잠하다. 도쿄 다이토구에 사는 요시다 마코토(35)씨는 “코로나 초기엔 감염 위험 때문에 배달 음식을 몇 번 주문했는데, 한 끼에 1500~2000엔은 부담스러워 일주일에 한두 번에 그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노숙자들이 찾는 ‘무료 식품 배급소’를 찾는 일반인이 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매주 토요일 식품을 무료로 나눠주는 신주쿠 자립생활지원센터에 지난달에는 하루 531명이 줄을 섰다”고 전했다. 2년 전만 해도 100명 정도였다는데 5배 이상으로 폭증한 것이다. 한 일본인은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서 줄을 서도 되나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생활비가 없어 어쩔 수 없다”고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지만, 엔화 가치가 앞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엔화 구매력의 동반 추락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일본 미즈호리서치&테크놀로지는 올해 식료품 가격과 전기료 등 공과금 인상에 따라, 연 수입이 200만엔 미만인 2인 가구의 경우 평균 4만8000엔의 생활비 부담이 추가될 것으로 전망했다. 아키하바라에서 만난 한 일본인은 “정부는 코로나 직전인 2019년 10월 소비세를 10%로 올렸다”며 “간접세 인상은 부자보다 저소득층에 직격탄인데, 이래저래 가난한 20대만 고달프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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