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럽사진 원조 파리의 인싸.."나는 만큼 보인다"[이수연의 아트버스]<4>

오현주 2022. 5. 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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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예술로 끌어올린 펠릭스 나다르
열렬한 열기구 애호가로 세계 최초 항공사진 촬영
왕성한 탐험욕구로 사람 내면 담는 초상사진 명성
열기구 탄 자화상, 예술·기술 결합 '벨 에포크' 상징
펠릭스 나다르의 ‘열기구 곤돌라를 탄 나다르’(1863). ‘세계 최초로 항공사진 촬영’이란 기록을 가진 나다르가 스스로를 찍은 초상사진이다. 1858년 나다르는 밧줄로 묶은 열기구에 올라타 지상 80m 높이에서 파리의 한 마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실물은 없는 기록뿐인 ‘세계 최초’였다. 대신 몇 년 뒤 나다르는 당시와 비슷한 상황을 스튜디오에서 ‘연출’한 이 사진을 남겼다. 단단한 줄에 매단 커다란 바구니, 갈고리 모양의 닻, 손에 쥔 쌍안경 등 디테일과 더불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델의 포즈까지, 실제장면인 듯 깜박 속을 만큼 ‘정교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미술관 소장.
까마득히 오래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린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의 기원’이란 것을 말입니다. 문자를 대신한 소통이 예술의 목적, 그 전부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예술은, 또 미술은 다른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달고, 휴머니즘을 달고, 상상력을 달았습니다. 20세기쯤 오자 미래를 내다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딛고 서서 인간의 꿈이 도달할 그 너머를 꿈꿨던 겁니다. 이제 현대미술은 영역의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NFT에다가 메타버스에까지 닿아 있지 않습니까. 오랜시간 현대미술의 진격을 지켜봐온 이수연 학예연구사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비로소 가능했던, 예술의 창조적인 경계의 확장을 가져온 미술거장의 삶과 작품 읽기를 통해 예술로 꾸는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그 드넓은 ‘아트버스’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바야흐로 ‘셀피’를 앞세운 셀프프로모션 시대다. SNS 플랫폼 곳곳에는 젊음과 미모와 부를 뽐내는 사진이 흘러 넘치고 ‘쿨’하고 ‘힙’한 이미지가 막강한 자본이 됐다. 누군가는 자본주의의 끝을 달리며 경박해진 현대사회의 특이한 징후라고 걱정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SNS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멋진 이미지를 좇던 ‘힙스터’가 늘 존재했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도 있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유명인사이자 사진가, 또 열렬한 열기구 애호가인 펠릭스 나다르(본명 가스파르-펠릭스 투르나숑 1820∼1910)이다.

나다르는 소위 ‘셀럽 초상사진’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사진이 발명된 이후 초상화 대신 초상사진이 상업적으로 급증하던 1854년, 그는 첫 사진스튜디오를 열고 수많은 인사의 사진을 찍었다. 아나키스트 정치인 프루동을 비롯해 당대의 문호 빅토르 위고, 샤를 보들레르, 조르주 상드, 알렉상드르 뒤마, 또 음악가인 베르디, 로시니, 리스트와 화가인 코로, 들라크루아, 밀레 등이 주요 고객이었고, 그의 사진관은 파리 사교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문화살롱 같은 역할을 했다. 1874년 모네와 드가, 르누아르, 시슬리, 모리소 등이 조직한 인상주의 첫 전시회도 바로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이 전설적인 전시에 모네의 걸작 ‘인상, 해돋이’(1872)가 출품돼 ‘인상주의’란 단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장식 없는 어두운 배경, 전신 대신 반신…초상사진 틀 만든 나다르

사진은 19세기 광학·화학 분야의 급속한 발전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1837년 사진발명가 다게르를 시작으로 1839년 네거티브 기술의 발명까지 빠르게 발전한 사진은 근대기술의 총아로 신문물을 상징했다. 왕정과 귀족을 대신해 산업혁명과 무역업을 바탕으로 신흥세력이 된 부유한 자본가들은 초상화 대신 초상사진에 욕망을 투사했고, 그 속에 지위와 부를 드러내는 장식물을 함께 박아냈다.

하지만 파리의 명사들 사이에서 나다르의 사진이 유명했던 것은 여느 초상사진과 달리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초상사진은 장식이 없는 어두운 배경에 인물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전신 대신 신체의 절반 이하를 취해 인물의 디테일한 표정과 신체적 특징을 잡고자 했다. 특히 대상의 일상적 모습을 담기 위해 오랜 시간 모델과 대화하며 평소 습관과 성격 등을 자연스럽게 노출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풍자로 유명한 삽화가이자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1808∼1879)가 묘사한 나다르(‘나다르, 사진을 고급 예술로 끌어올리다’ 1862)를 보면, 당시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판화로 제작한 이미지에서 나다르는 열기구를 타고 높이 올라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바닥에 있는 다른 사진들을 제치고 말이다. 도미에의 이런 상찬은 나다르가 마치 초상화처럼 인물의 내면을 표현한 초상사진을 통해 사진을 정통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노레 도미에의 ‘나다르, 사진을 고급 예술로 끌어올리다’(1862). 화가·판화가·삽화가로 활약했던 도미에가 석판화로 묘사한 펠릭스 나다르.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며 프랑스 시내를 촬영하는 나다르의 작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표현했다. 도미에는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 서민의 고단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당대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가로 유명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나다르의 사진작품 중 하나인 ‘쥘 베른의 초상’(1878)은 그 생생한 예다. ‘해저 2만리’(1869), ‘80일간의 세계일주’(1873) 등을 쓴 고전 과학소설의 개척자로서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과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 다뤘던 쥘 베른(1828∼1905)은 인간의 진보에 확신을 품었던 소설가다. 나다르는 베른의 초상사진을, 어두운 바탕과 몸을 감싼 검은 양복을 배경으로 얼굴, 특히 이마와 눈에 시선이 가도록 처리했다. 비스듬히 앞을 바라보는 소설가의 꿰뚫는 듯한 눈빛과 엷은 미소는, 그가 소설로 묘사했던 과학기술의 진보가 가져다준 미래의 꿈·희망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베른의 이상에 공감했던 나다르는 그의 초상사진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까지 구현해냈던 것이다.

베른과 나다르의 각별한 관계는 잘나가는 초상사진가 이상인 ‘낙관적 기술주의자’ 나다르의 꿈을 상징하기도 한다. 1862년 나다르가 제작한 열기구 ‘거인호’에 영감을 받은 베른은 ‘기구를 타고 5주간’(1863)을 쓰며 과학소설가로 본격적으로 출발했고, 나다르의 캐릭터를 본떠 쓴 ‘지구에서 달까지’(1865)가 크게 성공하기도 했다. 실제로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다르는 과학기술이 선사한 경이로운 모험의 세계에 직접 뛰어들고 싶어했는데, 그 중요한 매개체가 ‘열기구’와 ‘열기구에서 찍은 항공사진’이었다. 이미 1855년에 ‘지도제작과 측지학에 항공사진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로 특허등록을 하고 1858년에는 직접 열기구를 타고 올라가 첫 번째 항공사진을 찍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 열기구 거인호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펠릭스 나다르가 촬영한 ‘줄 베른의 초상’(1878). 나다르가 촬영한 수많은 유명인사의 사진 중 한 점. ‘19세기 초상사진 일인자’로 꼽히는 나다르가 가진 사진작가로서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쓴 베른은 나다르와 기술로 미래를 꿈꾸는 이상이 통한 각별한 사이였다.


나다르의 꿈의 결정체였던 거인호는 열기구로 하는 여행의 효용성을 증명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비행선으로 안타깝게도 다섯 번 정도밖에는 비행할 수 없었다. 시험운항 때 파리에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까지 날았는데, 이 광경을 보러 몰려든 군중 속에는 나폴레옹 3세와 그리스 국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무려 4000피트(1219.2m)까지 올랐던 거인호는 돌풍을 만나 곤두박질치면서 30여분간 들판을 퉁퉁 튀어다니며 열기구에 탄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하다가 겨우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풍선이 터지고 착륙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심지어 열차와 충돌할 뻔했는데, 다행히 열차의 급정거로 큰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거인호의 요란한 이착륙은 큰 뉴스가 됐으며, 파리는 물론 미국 뉴욕에까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대문화 빅토르 위고 “나다르는 선지자이자 영웅”

나다르가 자화상으로 촬영한 ‘열기구 곤돌라를 탄 나다르’(1863)는 몽상가이자 발명가, 근대적 진보주의인 나다르의 정체성을 집약한 결정판이다. 엄청나게 비싼 열기구 값을 감당하기 위해 프로모션용으로 뽑아낸 사진은 사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이다. 열기구 대신 아마도 빨래바구니를 이용했을 사진에서 나다르는 쌍안경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포즈를 취해, 높은 공중에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열기구의 장점을 한껏 드러냈다. 바구니 옆에 붙은 닻, 바구니를 매단 줄 등은 열기구 장치를 그대로 재현해 감상자의 환상을 증폭시킨다. 무엇보다 트레이드 마크 같은 수염에 댄디한 양복을 입은 나다르는 새로운 교통수단인 열기구의 안전하면서도 상업적인 가능성을 상징하는 광고모델로서 ‘근대의 꿈’처럼도 보인다. 이 유쾌하면서도 힙한 초상사진은 명함만한 작은 사이즈로 제작돼 저렴하게 판매하며 대중에게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의 열기구 타기는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멋진 프로젝트로 남을 수 있었다.

앙리 드 몽토의 ‘거인호의 사고’(1863). 펠릭스 나다르의 ‘꿈의 결정체’라 할 열기구 거인호가 운행 중 돌풍을 만나 바닥으로 곤두박칠치던 장면을 묘사한 신문삽화.


거인호 이후에도 나다르는 항공기구를 향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날 수 있는 권리’란 선언문을 쓰고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열기구 대신 스스로의 동력으로 날 수 있는 항공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은 새보다 훨씬 잘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날 수 있으려면 새보다 더 나은 비행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며 친구 빅토르 위고(소설 ‘레미제라블’ 작가)에게 선언문을 보냈고, 위고는 ‘세계인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답신하며 나다르를 선지자이자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나다르의 열정은 한동안 그를 경제적으로 휘청이게도 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세상을 향해 비행의 꿈을 설득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꿈은 예술과 기술이 어우러진 벨 에포크(19세기 말부터 1차대전 발발 전까지 ‘아름다운 시절’을 일컫는 말)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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