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지는 공사비 인상 요구에 한숨 깊어진 주택사업자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시멘트부터 레미콘·철근콘크리트까지 건설 원부자재의 가격이 줄줄이 오르면서 발주자인 주택사업자들이 비용 인상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시공사는 물론 하도급사까지 공사비를 높여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어서인데, 분양가를 조정하기 어려운 사업자들은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에 주택사업자들은 정부에 분양보증료와 개발부담금과 같은 부대비용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통상 공동주택 건설사업에서 주택사업자들은 시행 역할을 맡고, 건설사들은 원도급을 맡는다. 철근·콘크리트 업계를 비롯한 전문건설업자들은 하도급 역할을 한다. 주택사업자(시행사)→종합건설사(원도급사)→전문건설업자(하도급사) 순으로 발주가 이뤄지는 방식이다.
◇ ‘분양보증료·개발부담금 인하’ 카드 꺼낸 주택사업사업자
12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최근 대한주택건설협회(주건협)는 국토교통부에 원자잿값 인상에 따른 충격 완화를 위해 주택사업의 부담완화를 위한 정책을 제안했다. 원자잿값 인상으로 시멘트·레미콘 업계가 줄줄이 가격을 올리자, 주택을 최종적으로 공급하는 주택사업자들이 비용부담을 덜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주건협이 요구한 것은 개발부담금 50% 감면과 분양보증 수수료 50~70% 인하다. 두 비용은 원자잿값 인상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러나 현행법상 30가구 이상의 공동주택을 짓는 주택사업자는 계약자의 80% 이상이 동의해야 분양가를 올릴 수 있는 등 분양가격을 쉽게 올릴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다른 항목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줄이려는 차원에서 이런 방안을 냈다는 게 주건협 측의 설명이다.
개발부담금은 대지를 조성하고 주택을 짓는 사업자에게 징수하는 부담금으로, 정부는 개발이익의 최대 25%를 이 비용으로 납부하도록 하고 있다. 분양보증 수수료는 주택도시금융공사(HUG)가 분양입주금으로 납부한 계약금과 중도금의 환급을 책임지는 대신 내야하는 비용으로, 대지비·건축비 등 지출용도별로 연 0.138~0.469% 수준이다. 일반분양을 추진하는 곳에서는 필수적으로 지불해야 한다
정부는 과거에도 유사한 조치를 실시한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2차례에 걸쳐 개발부담금을 한시적으로 면제한 바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한 지난 2020~2021년 사이에는 HUG의 보증수수료를 26.8~70% 낮추기도 했다. 주건협 관계자는 “현재 상황은 IMF와 코로나 사태에 버금갈 만큼 심각하다. 당시 시행했던 개발부담금 한시적 감면, 보증수수료 인하 조치를 추진해도 될 정도”라면서 “이런 조치가 있어야 기업들의 경영여건이 그나마 개선될 것”이라고 했다.
◇ 원자재업계에서 건설사로 번진 ‘물가 인상’ 요구
주택사업자들이 이 같은 행동에 나선 것은 건설 중간재 및 하도급 업체를 중심으로 공사비 인상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시멘트부터 레미콘 등 건설 중간재 업계를 중심으로 납품단가를 10% 이상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하도급사인 철근·콘크리트 업체와 창호·커튼월 업체들도 20% 안팎의 공사비 인상을 요구하며 셧다운(공사 중단)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에는 원도급자인 건설사들까지 공사비 인상 요구에 나서면서 주택사업자들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지난 3월 대형건설사를 회원사로 둔 대한건설협회는 국토교통부에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을 통해 민간 발주자에 대한 공사기간 연장·계약금액 조정의무 근거를 신설하고, 위반시 과태료 부과 등 제재 조항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민간공사의 공사비 인상을 막고 있는 ‘물가변동 배제 특약’(물가변동으로 인한 계약금액 조정을 배제하는 특약)이 법적으로 무효라는 내용의 국토부의 유권해석을 받아내기도 했다.
건설사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주택사업자들의 부담은 커질 전망이다. 통상 주택사업에서 건축공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50%에 달한다. 대지비를 따로 내지 않는 정비사업의 경우 건축공사비 비중이 60~70%로 높아진다. 분양가가 고정된 상태에서 원자잿값 인상으로 각종 공사비가 오를 경우 사업시행자의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주택사업업계 관계자는 “원자재업계에서 시작한 가격인상이 하도급업체와 원도급업체, 발주사로 전가되고 있다”면서 “민간공사도 공사비 인상이 이전보다 더욱 쉬워진다면 건설사업자들도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 전문가 “혜택 제공 신중해야… 사회 전체가 비용 짊어질수도”
전문가들은 원자잿값 인상으로 주택사업자들의 공사비 부담이 커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이들에게 혜택을 제공할 경우 다른 이해관계자들로부터 비판에 직면할 수 있어 신중해야한다고 조언한다.
분양보증료 인하의 경우 그나마 논의가 숙성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에서 분양보증료가 높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고, 국토부도 지난해 분양보증료 인하를 위해 분양보증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외에도 다른 업체의 시장 진입을 허용하는 방안 등을 검토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보증료 인하는 과거에도 논의된 바 있는 사안이라 추진해볼 만하다”면서 “보증료를 낮춰주면 그만큼 주택사업자의 이익이 높아지므로, 공사비 인상으로 인한 손실을 어느정도 완화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개발부담금 완화는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불거진 대장동 사태 등으로 민간 개발이익의 환수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진 상황에서 부담완화를 추진할 경우 여론의 반발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다. 또 이를 완화할 경우 지방의 세수가 줄어들어 건드리기 쉽지 않다. 전영준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공사비와 관련 없는 각종 부담유발금이라든지 조세성격의 비용을 인하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면서 “발주자한테 특혜를 주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고 지적했다.
업계의 요구가 쇄도하면서 정부의 고심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최근 건설자재 원가 급등 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가격 동향을 모니터링하는 한편, 수입선 다변화와 기본형건축비 인상 검토 등 대책 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여러 업계로부터 상당히 많은 제안이 들어와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면서 “관계부처와 관련 제안을 검토해 추진가능 여부를 따져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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