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마르코스 가문은 어떻게 부활했을까..그 3가지 이유

김원장 2022. 5. 1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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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주니어(Ferdinand Marcos Jr)가 아버지 마르코스대통령과 함께 말라카낭궁에서 쫓겨날 때가 29살 때였다. 1986년 2월 26일 새벽 쫓기듯 미 공군 C-141 수송기에 타고 가족과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오른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36년만에 '마르코스 주니어'는 이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필리핀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1억 필리핀 국민들은 왜 자신들이 쫓아낸 독재자의 아들을 다시 뽑아줬을까.

1.SNS
마르코스 주니어는 철저히 SNS 중심의 선거운동을 펼쳤다. 거리유세나 언론 인터뷰 대신 틱톡과 유투브, 페이스북에 집중했다(오늘 보니 689만 명이 그의 페이스북을 팔로우한다).SNS에는 간결한 메시지와 친근한 이미지가 잘 정리돼 있다. 핵심은 '아버지 마르코스 시대가 잘못 평가됐다'는 것이다.

86년 마르코스대통령이 물러나고 필리핀정부는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그의 재산을 추적했다. 30억 달러(4조원 가량)를 몰수하고 그의 은닉 재산을 모두 100억 달러 정도로 추산했다. 하지만 수많은 SNS가 이런 부정축재 사실을 부인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재산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SNS에는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가득하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버마 등에서 약탈한 천문학적인 금괴를 야마시타 도모유키 총 사령관이 필리핀에 숨겨놨는데, 패전으로 본토로 옮겨갈 수 없게 됐다.
당시 변호사였던 마르코스가 이를 설득해 금괴를 받았고 이들 금괴들이 오늘의 마르코스 가문의 부를 만들었다. 그것은 세상을 구할만큼 거대한 양인데, 그러니 마르코스 주니어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면 이 재산들은 다시 필리핀 국민의 것이 된다"

필리핀은 40세 이하 유권자의 비율이 52%나 된다. 이들 대부분이 마르크스 시대를 겪지 않았다. 제대로 된 현대사 교육도 없었다. 이들에게 마르코스 가문은 북부 일로코스(Ilocos Norte) 주의 반듯한 정치명문가일 뿐이다. 이들은 늘 미소를 짓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베푸는 사람들이다(실제 이멜다 여사는 기자회견을 하다가 청중에게 불쑥 자신의 값비싼 팔찌를 벗어준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이를 통해 착한 부잣집 아들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다들 그를 친근하게 '봉봉'( BONGBONG/사탕이라는 뜻)이라고 부른다. 수줍음 잘타고 여리며 친근하다. 그는 대중과 대화를 할 때도 타갈로그어와 영어를 한문장씩 섞어서 사용한다. 그가 던지는 메세지는 하나다. "과거보다 미래의 필리핀을 이야기합시다"

마르코스 주니어 당선자의 페이스북, 약 700만 명이 팔로우한다. 주로 유세현장의 영상과 부드럽고 따뜻한 컨텐츠들로 채워졌다. 아들 산드로 마르코스(28)가 아버지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는 형식의 영상. 아들 산드로 마르코스(이멜다의 손자)도 이번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 페이스북 영상만 모두 264만명이 봤다 . (사진/ 마르코스 주니어 페이스북 캡처)


2.족벌정치

필리핀 국민들은 정치를 할 수 있는 가문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마르코스 가문은 이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망명후 5년만인 1991년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온 이멜다여사는 남편의 고향에서 손쉽게 주지사와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이멜다는 본인이 대선에 출마해 두차례 낙마한 뒤부터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의 '킹 메이커'가 된다.

큰딸 '이미 마르코스(Imee Marcos)'도 역시 아버지의 고향에서 주지사를 3차례 역임하고 지금도 상원의원이다. 마르코스 주니어 역시 상·하원의원을 역임했다. 심지어 마르코스 주니어의 아들(이멜다의 손자) 산드로 마르코스(28)도 이번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러닝메이트 부통령으로 출마한 '사라 두테르테(43, Sara Duterte)' 다바오시 시장도 현 '두테르테' 대통령의 딸이다. 이번 대선에선 이렇게 남부의 권력인 '두테르테' 가문과 북부 권력인 '마르코스'가문이 연합했다(연합 했지만 합의되거나 발표된 정책은 없다) .

당연히 승부는 쉽게 기울었다. 다음 대선 후보는 '사라 두테르테'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필리핀 정치인은 이렇게 이름만 바뀐다. 성은 잘 바뀌지 않는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최고 정적이였던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암살당하자 자연스럽게 아내 '코라손 아키노'여사가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린 그녀는 이어서 필리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6년 단임제 등 필리핀 민주화의 초석을놓았지만, 정치 경제적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3세' 역시 상· 하원의원을 역임한 뒤 2010년에 필리핀 대권을 잡았다. 필리핀에서 정치명문가들은 정경유착을 통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3. 실패한 과거 청산

지난 83년, 마르코스정권을 무너뜨리고 유력한 대안으로 자리잡았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귀국길에 오르다 여객기 트랩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이렇게 마르코스 대통령의 최고 정적이 사라졌지만 진실을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마르코스 가문에서 천문학적인 재산이 몰수됐지만 누구도 사법처리를 받지 않았다. 야당과 시민들은 여러차례 탈세 등으로 마르코스 가문의 법적 단죄를 요구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 마르코스 대통령은 72년 계엄을 선포한 뒤 9년 넘게 7만 명의 시민들을 잡아들였다.

그중 상당수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3천여 명이 사망했다(자료 앰네스티). 이런 과거는 이제 대부분 잊혀졌다. 이어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현대사는 계속됐다. 정경유착을 끊지 못한 정부는 경제개발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가 더 나았다"라고 믿는 국민들이 늘어났고 그렇게 마르코스 가문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대선 승리 직후 ‘마르코스 주니어’ 당선자가 아버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찾았다(두테르테 대통령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유해가 국가 영웅묘지에 안치되도록 허가해줬다). 아버지의 영정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르코스 주니어. (사진/ 마르코스 주니어 트위터)


지난 7일 마닐라베이에서 마르코스 주니어의 마지막 유세가 있었다. 주최측 추산 70만명이 모였다. 다들 마르코스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고 다가올 승리에 흥분해 있었다. KBS와의 인터뷰에 응해준 한 여성은 자신이 마르코스를 지지하는 이유를 '그가 올바른 사람(Decent man)이라서 지지한다'고 답했다.

그가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되물었더니, "마르코스 가족에 대한 대한 수많은 거짓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았겠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였다.

독재자의 아들이라고 독재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가 가난한 필리핀의 오늘을 바꿀 수 있을까. 이멜다가 남편과 함께 말라카낭궁에 입성한 지 57년이 지났다. 그녀의 가족들은 여전히 화려하고 필리핀국민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지난 60년대 일본에 버금갈 만큼 인프라가 좋았던 필리핀은 마르코스 집권 이후 계속 침체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태국 등 여러 동남아국가들이 필리핀 경제를 추월했다. 취재를 마치고 출국하기 위해 찾은 마닐라의 국제공항은 낡은 버스터미널처럼 낙후돼 있었다. 이 공항의 이름은 암살당한 아키노의원의 이름을 따서 '베니그노 아키노' 공항이다.

이멜다 마르코스(93), 망명 6년만인 지난 91년 필리핀으로 돌아와 30여년동안 아들의 ‘킹메이커’ 역할을 했다. (사진 /로이터)

김원장 기자 (kim9@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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