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있었던 만남의 화학작용과 인류 '대표 문화'인 책의 효용은 계속"

조해람 기자 2022. 5. 1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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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영업 마치고 문 닫는 '레드북스' 김현우 대표·양돌규 총무

[경향신문]

12년간의 영업을 마치고 폐업하는 인문사회전문책방 레드북스의 김현우 대표(왼쪽 사진)와 전 양돌규 총무 (오른쪽). 우철훈 선임기자
탈핵·환경·사회운동 모임 공간
고등학생운동 출신인 양 총무와
‘책장사 그 이상’을 꿈꾼 김 대표
“서점의 위기? 책의 생명력 믿어”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변신>을 쓴 작가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말이다. 책을 통해 고립된 사람들 사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자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2010년 서울 종로구 서대문역 인근 한 오래된 건물 2층에 문을 연 인문사회전문서점 ‘레드북스’의 김현우 대표와 양돌규 총무다. 책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매개”라고 믿는 두 사람은 레드북스를 독립서점이자 여러 진보적 사회운동의 모임공간으로 운영해 왔다. 그러나 최근 12년 영업을 마치고 폐업을 결정했다. 지난 11일 레드북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1980~1990년대만 해도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대학가의 필수 구성요소였다. ‘그날이오면(서울대)’ ‘오늘의책(연세대)’ ‘풀무질(성균관대)’ 등에서 대학생들은 최신 담론을 접하고 토론했다. 김 대표와 양 총무도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죽돌이’였다. “거기서 살았죠 뭐. 졸업할 때까지 학교 중앙도서관은 4번밖에 안 갔는데, 책방은 꼭 들렀다 갔어요.” 90학번 김 대표에게 책방은 필요한 자료와 사람이 늘 있는 곳이었다. 고등학생운동 출신인 양 총무는 청소년기부터 성균관대 앞 책방 ‘논장’에서 하루 몇 시간씩 책을 읽었다. 사장이 “돌규야 밥 먹고 올게”하며 가게를 맡기고 외출할 정도였다.

‘책만이 할 수 있는 매개 역할’을 기억하는 김 대표는 운동권 선배이자 술친구인 진보정당 활동가 최백순씨와 2010년 레드북스를 차렸다. 양 총무는 중간에 합류했다. ‘책장사’만 하지는 않겠다며 매대 대신 대형 테이블을 들였다. 사회운동가들은 레드북스에서 12년간 수많은 세미나와 북토크, 회의, 상영회 등 행사를 열었다. 2015년, 고등학생운동을 다룬 후일담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 북토크 때는 고등학생운동을 경험한 30여명이 함께했다.

들여오는 책도 아무거나 고르지 않았다. 서점 신간코너는 기후위기, 탈핵, 협동조합, 페미니즘 등 주제로 분류돼 있다. 변화하는 사회운동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한 배치다. 서점 대부분을 차지하는 헌책은 두 사람처럼 과거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탐닉했던 독자들이 이사·이민을 가면서 기부한 것이다. 헌책을 받다 보니 희귀한 ‘레어 아이템’도 많다. 장준하의 잡지 ‘사상계’부터 1990년대 대표 진보언론 ‘월간 말’, 젊은 시절 소설가 김영하가 투고한 문화비평지 ‘오늘예감’, 백기완 선생의 ‘노나매기’ 창간호 등이 원본 그대로 놓여 있다.

“굿바이 레드북스, 아쉽지만 여기까지.” 지난 4일 레드북스 페이스북에 폐업 공지가 뜨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입주한 건물이 재건축되는 것이 폐업의 1차적 이유였지만, 김 대표는 “그간 운영이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에너지정책 연구자이고 양 총무는 노동운동사 연구자로 각자 ‘본업’이 있지만, 개인 일정 외에는 늘 이곳을 지키며 공간과 정을 쌓은 터다.

줄어든 독자층조차 온라인서점이 흡수해 작은 동네서점의 생존은 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들은 책과 서점의 생명을 믿는다. 2010년 문을 열 때도 출판시장은 위기였다. “10년 안에 종이책이 사라진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여전히 (종이책을) 보잖아요. 빨리 보고 사라지는 정보는 스마트폰에 다 들어왔지만, 여전히 책의 소용이 존재하죠(양 총무).”

이들은 반지성주의와 사회위기가 가속화하는 오늘날 책의 효용은 더 크다고 본다.

김 대표는 “사람들이 화가 많이 나 있고, 나와 다른 의견은 듣기 싫어한다. 그럴수록 기초와 얼개가 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단순히 정보를 모은 게 아니라 일정하게 배열하고 상대를 이해시키려 한 인류 대표 문화”인 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레드북스를 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만남이나 화학작용이 있었어요. 운동의 전승에 어느 정도는 기능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날 인터뷰를 마칠 때쯤 청년들이 삼삼오오 레드북스에 모여들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의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카운터에 놓인 커피머신으로 공정무역 커피를 내리며 김 대표는 회의를 준비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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