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는 아직 출판의 디지털 혁명을 불허한다

김소연 2022. 5. 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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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도서 전쟁: 출판계의 디지털 혁명'
英 사회학자 존 B. 톰슨, 출판계 디지털 전환 분석
"출판, 다른 매체보다 디지털 파괴력에 잘 대처"
"출판사 생존 과제는 독자와 직접 소통"
음악·영상산업에서 디지털 콘텐츠 소비가 압도적인 것과 달리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출판산업의 갑작스러운 극적 변화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게티이미지뱅크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역대 최고 흥행작인 '마션'은 동명의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다. 실리콘밸리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앤디 위어는 인터넷의 등장 덕분에 데뷔작을 출간하며 미뤄 뒀던 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위어는 개인 블로그에 연재한 글이 화제가 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출판 에이전시의 연락을 받았다. 신인 작가에게 진입 장벽이 높았던 출판산업은 디지털 기술 발달로 큰 변화를 맞았고, 무명의 작가 위어는 국제적 스타로 떠올랐다.

영국의 대표적 사회학자이자 케임브리지대 사회학과 교수인 존 B. 톰슨은 위어의 사례를 "출판에서 일어난 디지털 혁명의 좋은 면 중 하나"로 꼽는다. 톰슨은 디지털화가 도서산업에 끼친 영향과 그 전개 과정을 고찰한 신간 '도서 전쟁: 출판계의 디지털 혁명'에서 "전례 없는 새로운 기회가 개인과 조직 모두에게 열리고 있는 반면, 표면 밑에서는 산업의 구조판이 바뀌고 있다"며 "블로그에서부터 베스트셀러에 이르기까지 '마션'이 일으킨 놀라운 성공은 출판 디지털 혁명의 역설을 보여주는 전형"이라고 설명한다. 책은 수백 년간 구축돼 온 출판산업에 디지털 기술이 미친 영향을 미국과 영국 출판계의 지난 20여 년의 통계와 사례 연구 등을 통해 짚어 본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실 각 매체의 디지털 전환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음악산업은 디지털 다운로드가 CD를 대체했고 영상산업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TV프로그램을 잠식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 도래로 전자책이 종이책 시장을 압도하리라는 전망만큼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종이책은 많은 이들의 예상보다 생명력이 훨씬 질겼다.

저자는 이처럼 급격한 디지털화 흐름 속에서도 출판산업이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종이책만의 매력', '넘겨 읽는 맛'과 같은 모호한 말로 설명하는 대신 실증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가령 '북플릭스', 즉 전자책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되지 못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정액제 업체 스크립드(Scribd)와 오이스터를 소환한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가치 있는 콘텐츠를 지속성 있는 조건으로 다량 확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두 업체는 주류 출판사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임계값' 또는 '사용당 지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고안해냈다. 독자가 특정 임계값 이상을 읽으면 출판사에 정해진 금액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열성 독자가 많으면 출판사에 지불하는 돈이 구독료를 넘어서기 때문에 업체들은 독자가 하나의 콘텐츠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콘텐츠로 쉽게 이동하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해 뒀다. 이 같은 노력에도 기존에 문서 사업을 갖고 있던 스크립드는 살아남았지만 제로 베이스에서 출발한 오이스터는 침몰했다.

무엇보다 전자책은 새로운 형태의 책의 창조가 아닌 책의 '포맷', 즉 포장만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앨범을 풀어 개별 곡을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음악산업과 달리 각 장(章)이 통합된 구조인 책은 묶음 해체의 이점이 없다. 긴 문장을 화면에서 읽는 경험이 종이에서 읽는 경험만큼 좋지 않다는 실질적 단점도 있다.

이처럼 아직 전자책의 파괴력은 크지 않지만 출판계의 디지털화는 광범위하고도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다. 각 콘텐츠 정보는 디지털화된 데이터 형식을 띠면서 쉽게 조작되고 저장되며 유통이 용이해졌다. 저자는 자가 출판, 크라우드 펀딩, 오디오북 등 여러 새로운 출판 모델을 분석한다. 다양한 자가 출판 플랫폼의 등장으로 기존 출판계에서 거절당한 작가들이 기회를 얻었다. 크라우드 펀딩이 시도되면서 책을 출판하고 나서 시장을 찾는 게 아니라 책을 위한 시장을 먼저 찾고 출간하는 시스템이 가능해졌다. 독자를 창작 과정의 일부로 만든 셈이다.

존 B. 톰슨. 한울엠플러스 제공

책은 구글, 애플, 아마존 등 다국적 기술 기업이 출판계에 미친 영향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인쇄책과 전자책 모두에서 시장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는 아마존을 비롯해 이들 기업은 다른 업종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비자의 선택과 구매 행동 정보를 빠른 속도로 빨아들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책은 출판사들이 독자와 직접 소통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출판산업의 미래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독자들의 책 구매·소비 방식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독자의 구매·독서 습관 정보를 구하는 일을 서점에 의존해 왔던 출판사들은 이제 최종 고객인 독자에게 집중해야 한다. 또 콘텐츠 창작자인 작가와 콘텐츠 소비자인 독자를 직접 연결하는 서비스 제공자로 거듭나야 한다.

막연히 짐작만 하던 출판계 디지털 전환의 혼란을 2013년부터 2019년 사이에 진행한 180회 이상의 인터뷰와 각종 통계 자료로 검증해 유익한 정보가 많다. 다양한 디지털 출판 사업 모델과 기술을 상세히 다뤄 출판사는 물론 작가와 편집자, 독자까지 출판산업의 모든 주체에게 콘텐츠 창작 산업의 미래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제공할 책이다. 700쪽이 훌쩍 넘는 분량에 일부 내용이 중복되기는 하지만 가독성도 나쁘지 않다.

저자는 출판산업이 디지털 전환의 격동 속에 다른 많은 분야보다는 잘 대처해 왔다면서도 자만할 근거는 없다고 경고한다. 책 말미에 남긴 저자의 말처럼 여타의 매체와 마찬가지로 책의 미래 역시 "새로운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얼마나 효과적이고 상상력 풍부하게 적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서 전쟁·존 B. 톰슨 지음·전주범 옮김·한울엠플러스 발행·768쪽·5만9,000원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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