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 20조 R&D 지원받는데 20억(출연연·주요대학 연평균) 벌어..임팩트 큰 'IP(지식재산) 창출' 힘써야"
■'과기 연구시스템 혁신' 제언
출연연·대학 투자 10년 지속에도
기술이전료 등 가시적 성과 저조
ETRI는 'IT 실용화'에 특화 전략
기술이전·표준특허로 640억 수입
R&D과제 너무 쪼개 생계형 그쳐
연구 몰두하게 중장기로 제시해야
11일 대전 대덕연구단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열린 ‘제1회 국가연구소 기업가 정신 토크 콘서트’ ETRI편에서는 기술패권 시대에 과학기술 경쟁력 없이는 국가 생존과 미래 성장 동력을 담보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특히 국가연구소(정부 출연 연구기관)와 대학에서 성과가 부족하다며 기업가 정신 고취와 논문·특허 위주의 평가 시스템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내놓았다.
출연연이 기초·원천 연구에 역점을 둘 수 있도록 정부에서 연구개발(R&D) 과제를 너무 쪼개지 않고 중장기로 제시해야 한다는 주문도 많았다. 현재는 세분화된 연구 과제를 수주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출연연의 연구과제수주시스템(PBS) 비중이 평균 절반가량이나 된다. 이로 인해 연구원들이 인건비를 보전하기 위해 생계형 연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박희재 서울대 AI밸리 단장은 “출연연과 대학에서 연 20조 원 이상의 정부 R&D 예산을 쓰고 있다”며 “하지만 이러한 투자가 10여년간 지속됐음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부진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ETRI는 투자대비수익률(ROI) 측면에서 잘하고 있지만 다른 출연연과 주요 대학의 평균 기술이전 수입(로열티)은 각각 연 20여 건에 20억~30억 원가량으로 저조한 편이라고 했다.
김명준 ETRI 원장은 “ETRI의 ROI는 약 9%로 독일 프라운호퍼연구회(FhG)를 넘고 대만 ITRI, 일본 AIST, 미국 국립연구소의 성과보다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 정보기술(IT) 실용화에 특화된 ETRI는 기업에서 받는 기술이전료가 연 150억 원가량으로 미국의 글로벌 모바일사 등에 대한 표준 특허 수입까지 합치면 640억 원가량(2020년)으로 출연연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다만 전문가들은 ETRI가 디지털 이동통신(CDMA) 상용화 연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결국 표준 특허를 갖고 있는 미국 퀄컴이 삼성전자 등 우리 기업들로부터 지난 10여년간 10조 원에 가까운 로열티를 받았다며 출연연의 영향력이 큰 기초·원천 연구를 희망하고 있다.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은 “전체 출연연의 기술료 수입이 연 1000억 원가량”이라며 “특허 활용률이 36%선인데 보다 임팩트가 큰 지식재산(IP) 창출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의지를 보였다. 출연연이 국가 임무형 R&D에 집중하고 전략기술 육성, 산학연과 지역 R&D의 혁신 플랫폼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출연연의 자부심과 긍지가 많이 떨어져 마음이 아프다”며 “하지만 이제는 연구비가 없어 연구를 못하는 시대가 아니니까 소명 의식을 갖고 도전해달라”고 당부했다. (학력 등을 보지 않고 뽑는) 블라인드 채용 등 출연연의 비합리적인 제도를 고쳐 나가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김 원장은 “출연연은 정부에서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창의·도전적 연구,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고령화·저출산, 탄소 중립 등), 창업·기술사업화 등의 R&R(역할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며 분발을 다짐했다.
최문기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KAIST 명예교수)은 ETRI 원장과 장관 시절 기술 사업화와 융합 연구 촉진 정책을 상세히 소개하며 “기초·원천 연구 과제를 통해 중요한 이론을 만들고 기술 사업화로 연결해야 한다”며 “공공연구 성과 확산과 실용화를 위해 출연연 간 담을 허물고 융합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출신인 김명수 대전광역시 과학부시장은 “ETRI의 과거 CDMA나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같이 국민이 체감하는 대형 성과가 중요하다”며 “최근에는 이런 성과가 부족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출연연의 고질병인 PBS 문제도 이날 도마에 올랐다.
김 이사장은 “정부 연구 과제가 세분화·파편화됐다”며 “중장기 대형 과제 중심의 연구 환경 조성을 위해서는 PBS 개선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실제 정부 R&D 과제는 2016년 1만 2000여 개에서 올해 2만 4000여 개로 급증해 임팩트 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데 지장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김 부시장은 “PBS 자체가 나쁘다고 볼 수 없지만 연구원이 인건비 일부를 PBS로 충당해야 해 생계형 과제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김 원장은 “ETRI 예산의 PBS 비중은 70%대인데 지난 10여년간 전체 예산은 큰 변화가 없지만 연구 과제 수가 300개에서 600개로 급증했다”며 “PBS를 하더라도 과제의 규모를 크게 가져가는 것이 해법”이라고 밝혔다.
최 전 장관은 “CDMA, 반도체 DRAM, TDX 등도 PBS를 통해 이뤄낸 성과로 PBS가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라며 “하지만 퍼스트 무버(선도자)로 가야 하는 시점에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연구 과제에서 차지하는 PBS 비중은 35~40%가 적절하다”고 조언했다.
논문·특허의 양적 확대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김 부시장은 “연구원들은 하고 싶은 연구를 통해 논문을 쓰는 데 매진하지 기업을 도와 사업화하려는 의지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전시는 기술 기반 창업 허브를 목표로 테스트베드 역할에 들어갔고 창업 공간 제공에도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데 지난 20년간 대학의 성과는 SCI급 논문을 세 배로 늘린 게 전부”라며 “(대학과 출연연에서) 기업가 정신을 갖고 기술 창업에 관심을 둬야 하는데 창업 열기가 중국은 물론 일본에 비해서도 크게 부족하다”고 위기감을 토로했다. 그는 특허 등 IP 전략과 관련해 “논문을 중시하는 평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서울공대 동료 교수가 논문을 먼저 썼다가 6개월 뒤 중국 기업이 이를 참고해 상품으로 출시했다”며 ‘선특허 후논문’을 강조했다.
국가 R&D 혁신 방안에 대한 토론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최 전 장관은 “(출연연과 대학의) R&D 결과물의 기업 활용 비중이 형식적이라고 할 정도로 낮다”며 “평가지표를 바꾸면 기업가 정신 함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 교수는 “평가에서 기업가 정신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정우석 ETRI 재난안전지능화융합센터장은 “출연연에서 기초·원천 연구는 기술 자체를 평가하고 사회문제 해결형 과제는 논문·특허보다 서비스 확대 측면을 강조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김 이사장은 “도전을 수용할 수 있는 맞춤형 평가 시스템으로 바꿔나가겠다”고 화답했다. 김 원장은 “저도 연구자 시절 기업에 180여 건의 기술이전을 했다”며 “기술이전과 창업을 활성화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 5만 달러 시대를 앞당겨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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