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닮은 빌라·돌담 형상화한 빵집.. 자연과 하나가 되다

박경일 기자 2022. 5. 1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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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라산 중산간의 롯데아트빌라스 전경. 세계적인 명성의 건축가들이 마치 경연을 하듯 지어낸 빌라가 가득한 타운하우스다. 굴뚝처럼 생긴 구조물을 얹은 직육면체 빌라는 승효상 건축가가, 그 너머 흰색 곡선 모양으로 보이는 건물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것이다.
멕시코의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가 설계한 제주 부영호텔 &리조트. 붉고 노란 색감이 인상적이다.
사진 위부터 화산암을 써서 오름을 형상화한 구마 겐고의 빌라.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추사관의 추사 동상과 빈 공간. 주변 마을 풍경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창 없이 돌담처럼 지어낸 빵집 ‘버터모닝’.

■ ‘건축’이 예술이 된 섬 제주

승효상·구마겐고 등 세계적 작가들이 빚어낸 아트빌라스

바람의 통로 등 구현한 독립빌라 73채… 건축투어 진행도

한라산 중턱에 펼쳐진 비오토피아…‘水風石 뮤지엄’명소

현무암 활용 포도호텔·추사 벼루 모티브‘티스톤’도 작품

제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코로나19 와중에 두드러졌던 건 이른바 ‘가치소비’의 확산입니다. 가치소비란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제품에 대해 과감하게 소비하는 패턴을 말합니다. 이게 과소비나 사치와 다른 건, 무차별하게 고가의 소비를 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제품에 대해선 저렴하고 실속있는 것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에만 골라 돈을 쓰는 일. 이게 가치소비입니다. 코로나19 이후 일상생활에서도 그랬지만, 여행에서의 가치소비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소비의 대상이 물건이기보다는 ‘공간’일 때 그런 경향은 더 뚜렷했습니다. 여기서 공간이란 넓이나 효율이 아니라 미감과 취향, 혹은 방향에 더 가깝습니다. 예술과 상상력, 메시지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건 건축입니다. 건축이 가치를 만들어낸 매혹적인 공간을 찾아갑니다. 건축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이 도처에서 빛나는 곳, 바로 제주입니다.

# 일상 너머의 공간과 건축

제주의 건축이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곳이 일상의 경계 너머 공간이기 때문이다. 도시 건축의 중심은 기능과 효율이지만, 비일상의 공간에 가까운 제주에서는 미감이나 독창성의 무게가 더 크다.

효용성으로 따지자면 여행이란 실은 ‘꼭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을 가는’ 쓸모없는 일이다. 꼭 가야 할 곳을 가는 건 여행이 아니라 ‘출장’ 혹은 ‘이주’일 테니 말이다. 여행과 휴양은, 그래서 치열한 일상 건너편의 영역이다. 제주에 유독 독창적이거나 흥미진진한 설계의 건축이 많은 이유다.

제주에서 매혹적인 건축의 공간을 둘러봤다. 눈길을 끄는 대개의 건축이 여행자들의 로망을 구현해내는 고급 리조트나 골프장의 클럽하우스들이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현역 건축가들이 참여한 제주 중산간의 ‘롯데아트빌라스’와 거기서 멀지 않은 타운하우스 ‘비오토피아’, 그리고 거장 건축가의 유작인 제주 부영리조트, 제주에 새로 짓고 있는 JW메리어트 제주까지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만든 공간을 두루 살폈다.

건축가의 명성만으로 한몫하는 이런 곳 말고도, 지역 건축가가 훌륭한 솜씨로 지어낸 독특한 리조트와 커피숍도 있고, 뜻밖의 미감으로 빛나는 도서관과 작은 빵집도 있다.

두 번에 걸쳐 제주에 다녀오면서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의 포도호텔과 방주교회,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본태박물관과 글라스 하우스, 유민미술관 등 제주 건축의 고전으로 불리는 곳들까지 두루 돌아봤다. 한창 짓다가 공사가 잠시 중단된 이타미 준 박물관에도 다녀왔다.

# 승효상, 그리고 롯데아트빌라스

제주 건축 이야기를 건축가 승효상으로부터 시작한다. 설계한 건축물을 일일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승효상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두 곳만 들어보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이 그의 설계로 만들어졌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문재인 전 대통령 양산 사저도 그의 솜씨다. 설계 말고도 활발한 저작과 활동으로 대중과 거리낌 없이 만나는 인기 건축가이기도 하다.

승효상은 10년 전에 제주에서 세계적인 건축가들과 함께 타운하우스 롯데아트빌라스 건축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롯데아트빌라스는 내로라하는 명성의 건축가들에게 설계를 맡겨 완성한 예술적 감성이 충만한 73채의 독립 빌라로 이뤄진 최고급 주거단지다. 대한민국 상위 1% 부자를 겨냥한 곳답게 규모가 작은 게 63평, 큰 건 115평이다. 잔디 깔린 마당에 큰 수영장까지 있는 154평짜리 초호화 빌라 4개 동도 있다.

롯데아트빌라스는 다섯 개 구획(블록)으로 나뉜다. 건축가 승효상을 비롯해 도미니크 페로, 구마 겐고, 이종호, DA 글로벌그룹 등 건축가나 설계집단이 각각 구획을 맡았다. 구획마다 건축가가 설계한 똑같은 빌라가 줄지어 서 있다.

대규모 공공건축물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건축가들에게 제주 땅을 내주고 그들의 설계로 지은 빌라를 한곳에다 지었으니 말 그대로 ‘건축의 경연장’이라고 할 만하다.

롯데아트빌라스는 분양을 위해 지은 타운하우스이긴 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해도 숙박을 경험할 수 있다.

롯데아트빌라스에서 숙박하면 건축물을 둘러보는 투어 차원을 넘어 비록 하룻밤이지만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을 제 것으로 누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숙박요금이 비싸긴 하지만, 소유하는 비용에다 댈까.

# 세계적인 건축가를 호명하다

롯데아트빌라스를 설계한 건축가의 면면을 보자.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30대에 프랑스국립도서관을 설계하면서 주목을 받은 이후 독일 베를린올림픽 수영장, 룩셈부르크 유럽사법재판소 증축 등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2008년 지하 공간에 빛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화여대 캠퍼스센터(ECC)로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이 건물로 페로는 프랑스건축가협회 그랑프리를 받았다. 이후 그는 전남 여수에 예술공간 예울마루를 지었고, 비슷한 시기에 제주 롯데아트빌라스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구마 겐고는 안도 다다오, 반 시게루와 함께 손꼽히는 일본의 최고 스타건축가. 도쿄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환경문제에 천착해온 그는 도쿄올림픽 개폐회식이 열린 메인 스타디움을 삼나무 목재를 활용해 짓기도 했다.

승효상과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종호는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 건축가. 바른손센터, 박수근미술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등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 앞에서 감회가 느껴지는 건 빌라를 짓고 2년 뒤 여수 앞바다에 몸을 던지는 비극적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다. 회사 차원에서 프로젝트에 합류한 DA 글로벌그룹은 국내 굴지의 설계회사다.

롯데아트빌라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구마의 빌라였다. 현무암으로 낮고 둥글게 지붕을 얹어 오름을 형상화한 외관이 독특하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딴판으로, 실내는 높은 층고와 통창으로 개방감이 뛰어났다. 감각적인 ‘다실(茶室)’ 공간도 이색적이었다.

페로가 설계한 빌라의 외관은 마치 손 뜨개질로 뜬 레이스 장식을 붙여놓은 듯한데, 실내 공간이 온통 곡선과 원형이다. 수영장도 회랑도 둥글고, 심지어 침대도 둥글다. 공간 곳곳을 유리로 마감해 제주의 자연풍경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마지막으로 승효상. 그의 건축물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가장 공간이 넓으며 숙박요금이 가장 비싸다. 건축 의도를 그에게서 직접 들었다.

“빌라가 들어선 한라산 중산간은 산과 바다를 잇는 통로지요. 제주의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 그걸 생각하면서 설계했습니다.”

통로는 개념이자 상징이지만, 실제 복도나 거실 등의 공간설계에도 구현됐다. 건물 중앙의 공간을 마당으로 비워두고 긴 복도를 따라 방을 배치한 것. 건물 중앙 마당과 접한 통창 덕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닫힌 듯하면서도 개방적이다. 2층 공간에는 사우나와 히노키탕, 자쿠지, 수영장도 있다. 누군가 ‘제주에서 딱 하룻밤만 원하는 곳에서 재워주겠다’고 제안한다면, 가장 유력하게 고려해야 할 곳이다.

# 제주 ‘추사관’에서 꼭 봐야 할 것

롯데아트빌라스는 올해로 개관 10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5월부터 ‘승효상 건축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5시간짜리 당일 투어 프로그램이다.

승효상이 기획하고 그의 이름을 앞세웠지만 건축을 안내하는 도슨트는 그의 제자 양현준 건축가다. 롯데아트빌라스 투어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 외부의 건축명소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외부 건축 투어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 세운 기념관인 추사관을 들른다. 추사관 역시 승효상이 설계했다.

기념관의 전시공간은 모두 지하에 있고, 지상에는 단순한 직육면체 형태의 목조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추사가 남긴 걸작 중의 걸작 ‘세한도’의 그림 속 집과 꼭 빼닮아 거기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았는데, 승효상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작은 집들이 처마를 잇댄 마을 한가운데에 500평짜리 기념관을 지어야 했는데, 고민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생활 공간과 어울려야 할 텐데, 뭘 짓던 주변을 압도할 것 같아서요.”

궁리 끝에 전시실 공간을 모두 지하로 넣고 지상에는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형태의 집만 드러나게 했다. 거친 유배를 기념하는 공간은 그래야 마땅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어놓으니 다들 세한도를 떠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추사관은 세한도 그림 속의 집과 닮았다. 서귀포시 공무원은 건축가에게 묻지도 않고, 추사관 앞에다 세한도 속 소나무를 심었을 정도였다. 답안지를 베꼈다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승효상은 아직까지도 그게 “많이 억울하다”고 했다.

추사관을 다 짓고 나자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가 자기 동네에다 뭘 짓는다고 잔뜩 기대했는데, 화려한 건축물 대신 투박한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섰으니 왜 안 그랬을까. 승효상은 곧바로 마을을 찾아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설명회를 했다. 왜 건물을 이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 수수하고 투박한 건축이 왜 가치 있는지에 대해 말해줬다.

승효상은 추사관에서 ‘꼭 봐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지상 공간의 텅 빈 집 안에 덩그러니 놓인 추사 흉상이다. 화가 임옥상이 만든 흉상을, 승효상은 ‘걸작’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작가가 빈 집 가운데다 놓은 흉상을 승효상은 슬그머니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렇게 비워둔 곳은 관람객의 자리다. 추사의 텅 빈 집 한가운데 서서 추사가 추구했던 절제의 아름다움을 느껴보라는 의도다.

# 건축이 빚은 예술… 비오토피아

롯데아트빌라스에서 멀지 않은 한라산 중산간에 ‘비오토피아’가 있다. 비오토피아는 롯데아트빌라스보다 먼저 제주에 들어선 최고급 주택단지다. 87채의 단독주택과 116채의 타운하우스로 이뤄졌다.

비오토피아란 이름은 ‘생명(Biocoenosis)’이 살아가는 ‘장소(Tope)’이자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Utopia)’을 뜻한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는 22만 평의 부지에 띄엄띄엄 고급 주택을 들여놓았다. 롯데아트빌라스의 중심이 승효상이라면, 이곳의 중심은 작고한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다.

비오토피아는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한 재일교포 사업가가 투자해 만든 제주 최고의 주거단지다.

이타미 준은 이곳에서 비오토피아의 타운하우스와 커뮤니티 시설인 수(水)·풍(風)·석(石) 뮤지엄, 그리고 핀크스골프클럽의 클럽하우스 등의 설계를 맡았다.

수·풍·석 뮤지엄은 건물 자체가 오브제가 되고 명상의 장소가 되는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건축이 그대로 예술작품이 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건축이 빚어낸 빛과 소리가 마치 마술처럼 느껴질 정도다.

수·풍·석 뮤지엄은 타운하우스 단지 내의 사유공간. 처음에는 외부인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는데 이타미 준의 뮤지엄이 소문이 나면서 개방 요구가 잇따르자 주민들이 개방 결정을 내려 2015년부터 관광객을 받고 있다. 문을 열긴 했으되 개별관람은 할 수 없고 도슨트의 인솔하에 버스를 타고 돌아보는 단체 투어만 가능하다. 하루 관람 인원 제한이 있어 예약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마저 지난 6일부터 오는 6월 말까지는 투어를 중단한 상황이다.

# 고요함으로 가득한 공간

비오토피아의 단독주택과 타운하우스는 22만 평의 드넓은 부지에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데, 전체 면적을 가구 수로 나눠보면 한 가구당 지분이 1000평이 넘는 셈이다. 공간의 여유가 선사하는 건 빼어난 조망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집은 없다. 조금씩 방향을 틀어서 지었다. 한라산 중산간에서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는 각기 다른 풍경을 집집마다 하나씩 갖게 한 것이다.

비오토피아의 단독주택은 서울 삼성동무역센터를 지은 아시아 1위 건축회사인 일본 니켄세케이(日建設計)가 설계했고, 이타미 준은 공동주택 격인 타운하우스를 설계했다.

직선으로 마감한 타운하우스 외부는 단정하다. 실내도 화려하다기보다는 차분한 느낌이다. 인상적이었던 건 거실 중앙에 야외 중정을 둔 것. 환한 빛과 자연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다. 마당의 제법 넓은 잔디도 자연 친화적 느낌이다.

온통 자연으로 둘러싸인 타운하우스는 고요하다. 다른 어떤 소음도 없다. 떠들썩한 휴가가 아닌 편안한 휴식을 취하겠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아쉬운 건 비오토피아가 분양 단지여서 외지인은 숙박은 물론이고 단지 내 출입마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대신 이타미 준이 지은 인근의 포도호텔과 핀크스골프클럽 클럽하우스는 외부인도 출입할 수 있다. 실내공간은 조심스럽긴 하지만 외부를 둘러보는 것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없다.

포도호텔은 오름 같기도 하고, 초가집 같기도 한 호텔 건물이 낮고 겸허하게 땅으로 스미는 듯한 느낌이다. 복도와 중정의 선이 그려내는 독특한 미감, 그리고 제주의 자연재료인 현무암과 갈천 등으로 살려낸 디테일이 훌륭하다.

핀크스골프클럽의 클럽하우스는 뒤로 보이는 한라산의 능선에 맞춰 그림을 그리듯 지붕 선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제주산 흙벽돌과 이란산 붉은 대리석을 사용해 제주의 색을 구현했다.

비오토피아 주변에는 또 제주 건축 투어의 명소로 꼽히는 방주교회도 있다. 교회는 비오토피아에 거주하던 한 중견기업 대표가 이타미 준의 건축에 반해 사비를 털어 의뢰해 지어진 것이다.

# 지어지지 않은 건축이 눈길을 끌다

이타미 준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면, 그 여정의 마무리는 마땅히 ‘이타미 준 뮤지엄’이 돼야 하겠지만,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세워지고 있는 뮤지엄은 아직 미완성이다. 3월 중 완공이 목표였는데, 공사가 늦어져 이제 겨우 콘크리트 타설을 마쳤다.

뮤지엄에 전시될 그의 작품에 대한 궁금증도 있지만, 그보다 뮤지엄이 어떻게 지어질지가 관심이다. 대를 이어 건축가로 활약하고 있는 딸이 설계한, 아버지를 기리는 뮤지엄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ITM 건축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이타미 준의 딸, 유이화 건축가는 아버지의 초기작품인 ‘어머니의 집’과 제주 민가 모습을 모티브로 뮤지엄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눈길이 가는 곳이 또 있다. 범섬이 마주 보이는 서귀포시의 해안에서 오는 가을 개관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인 JW메리어트 제주 리조트 앤 스파다.

이곳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강렬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의 건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빌 벤슬리가 설계했다. 건축가 겸 조경디자이너인 벤슬리는 세인트레지스 발리, 푸꾸옥 JW메리어트 에메랄드 베이, 하와이 포시즌스리조트 후알라이 등 초호화 리조트를 비롯해 전 세계 휴양지에 호텔과 리조트 200여 개를 지었다. 과연 그는 제주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제주에는 작가의 명성에 비해 덜 알려진 곳도 적잖다. 제주 부영호텔 & 리조트는 건축과정에서 설계 원형이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2011년 타계한 멕시코의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의 유작. 붉은 원색과 파스텔 톤의 색채감을 덧댄 이색적인 건물이다. 레고레타는 생전에 건물로 쏟아지는 빛을 계산해 시시각각으로 공간의 질감과 색조가 달라지는 건축을 추구했는데, 이런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 자연과 인문을 드러내는 좋은 건축

오설록 티 뮤지엄의 다도 체험공간인 ‘티스톤’은 지난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했다.

숲 속에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인데 삼면의 외벽을 모두 창으로 둘러 건물 안에서 보면 푸른 숲이 통창을 통해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건축가는 평소 차를 좋아했던 추사의 벼루를 티스톤 건축의 모티브로 삼았는데, 그 증거가 건물 한쪽에 붓을 형상화해 굴뚝 형태의 돌로 쌓은 기둥이다.

세계적인 명성의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제주에는 제주 출신 건축가가 지은 눈에 띄는 건물이 적잖다. 제주 건축가들은 그들끼리 공유하는 신념 같은 게 있다. 제주의 자연환경에 맞게, 아니 최소한 해치지 않게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념이 드러나는 건축 중 인상적인 것이 박현모 건축가가 지은 애월의 빵집 ‘버터모닝’이다. 흔한 창 하나 없이 노출 시멘트 벽으로 외벽을 둘렀다. 모름지기 빵집이라면 먹음직스러운 빵을 진열한 전면 유리창이 있어야 할 텐데, 이곳은 시멘트 벽으로 사방을 둘렀다. 주변의 마을 풍경과의 조화를 위해 제주의 담벼락을 모티브로 설계한 것이다. 대신 건물 내부에 빛이 들어오는 중정을 두어 빵집 안은 환하고 밝다. 제주의 건축을 설명하면서 승효상이 몇 번이고 반복해 강조했던 얘기를 떠올린다. “땅에는 새겨진 무늬가 있습니다. 지형과 역사, 자연과 인문의 무늬를 드러내는 건축이야말로 좋은 건축입니다.”

■ 숲 품은 ‘기적의 도서관’

제주에는 ‘감응의 건축가’로 널리 알려진 고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도서관이 두 곳 있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 어린이도서관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TV 예능 프로그램 ‘느낌표’와 협력해 서귀포와 제주시에 각각 지은 ‘기적의 도서관’이다. 그 자리에 있던 솔숲을 베어내지 않고 건축물이 숲을 감싸 안은 듯한 타원형 구조로 설계한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이 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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