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녹두·백합·보말·전복·닭.. 어떤 재료든 '죽'이 척척.. 한 숟갈 넣으면 입에 착착

기자 2022. 5. 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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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대흥식당의 어죽. 민물고기를 갈아 밥을 넣고 끓여 낸 뒤 국수와 수제비를 함께 넣어 내온다. 민물 매운탕과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밥과 국수에서 나온 전분이 국물을 부드럽게 감싸 특유의 맛을 낸다.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 이우석의 푸드로지 - 죽

푸성귀·육류 등 다양하게 첨가

부안 백합·제주 보말·동해안 섭

지역 특산물 넣어 특별식으로도

동서양 고대부터 이어진 죽 요리

중국 패스트푸드점 메뉴도 있어

유럽에선 귀리 끓인 오트밀 먹어

일교차가 큰 요즘 같은 환절기에 감기 등 반갑잖은 손이 해거리 없이 찾아든다. 몸이 편찮을 때면 찾는 것이 죽이다. 물에 쌀을 넣고 푹 끓여서 먹는 둥 마시는 둥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죽이다. 가장 원초적 음식이 죽이다. 꼬치구이 다음으로 인류가 일찌감치 만들어 낸 음식이다. 밥처럼 순우리말인 줄 알고 있지만 죽은 한자어다. 죽(粥) 자가 따로 있다. 잉여농산물이 풍부하기 전까지 주식으로 먹었다. 밥과 떡은 이후에 나왔다. 죽을 쑬 때 필요한 것은 화력과 그릇(솥)이다. 그리고 숟가락이 필수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원시 농경 유적에서는 어김없이 이 세 가지 도구가 출토된다. 세계인의 선조들은 한때 모두 죽을 먹었다는 방증이다.

곡물은 늘 모자랐고 죽은 조리하기 가장 쉬운 음식이었다. 물을 흥건히 섞으면 많은 이에게 먹일 수 있었고, 곡물의 도정도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쌀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선 밥을 짓는 법을 깨닫기 전까지 죽을 먹어야 했다. 쌀뿐 아니라 조, 귀리, 수수 등 모든 곡물은 죽이 될 수 있었다. 공자가 제자들과 주유천하를 하던 도중, 어느 날 한 민가에서 묵어가며 노파에게 좁쌀죽을 맛있게 얻어먹었다는 일화가 논어에도 등장한다.

그저 곡물에 물을 넣고 묽게 끓여 낸 음식이니 태초에는 서양에도 존재했다. 빵보다 이르다. 고대 이집트에선 보리를 발효시킨 죽을 식사 대용으로 먹었다. 우린 그것을 맥주의 효시로 친다. 이후 제빵기술이 발달할 때까지 죽을 먹었다. 젖은 빵이라 부르기도 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콜드수프 가스파초(gazpacho)는 아라비아어로 ‘젖은 빵’이란 뜻인데 그 형태는 영락없는 죽이다.

모두가 먹던 음식이지만 그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죽 문화가 좀 더 발달했다.(요즘도 ‘K-죽’의 인기가 높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편찬한 책으로, 방대한 지식을 풀어내 ‘조선판 브리태니커’라 불리는 임원경제지(기업인이 보는 경제신문이 아니다)에 죽이 나온다. 여기서는 죽을 ‘쌀을 물에 넣고 끓이는 것’이라 정의했다.

당시 조선에는 죽의 종류도 꽤 많았다. 된죽과 묽은 죽을 따로 구분해 전()과 죽이라 하고, 뻑뻑한 죽은 ‘조’, 묽은 죽은 ‘이’라고 부른다고 상세히 적었다. 마실 수 있을 만큼 묽은 죽은 미음(米飮)이라 했고, 갈아 낸 녹말가루를 쓴 것은 응이, 굵게 갈면 원미죽, 미숫가루처럼 곡식 가루를 물에 타 먹는 즉석 죽은 암죽이라 따로 구분했다. 임원경제지 외에도 시의전서 등 각종 사료에 40여 가지의 죽이 등장한다. 조선은 이른바 ‘죽의 나라’였다.

하루에 5번을 차리는 궁중 수라상에서 임금에게 가장 먼저 제공하는 음식 또한 죽이다. 미음 등을 쑤어 차렸다. 이른 아침에 처음 대하는 밥상이라 해서 초조반(初朝飯)이라 불렀다. 수라상이라 해서 좋은 재료를 쓴 것이 아니라 그냥 쌀죽이었다. 찹쌀과 우유를 쓰는 타락죽은 워낙 우유가 귀했던 터라 왕실에서도 잘 찾아 먹기 힘든 귀한 죽이었다. 왕족이 크게 아프거나 해야 그나마 챙겨 먹을 수 있었다.

민간에선 죽을 쑤어 항아리째 선물하는 일도 잦았다. 누군가 아프거나 상을 치르면 죽 단지를 보내곤 한다는 내용의 문헌(국조오례의)이 있다. 요즘의 기획재정부 격인 선혜청이 한양의 걸인들을 모아 놓고 죽을 하사했다는 기록(영조실록)도 남아 있다. 기초소득 개념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죽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곡물의 종류에 따라 팥죽, 콩죽, 율무죽, 녹두죽 등 이름을 앞에 붙인다. 곡물 이외에 다른 푸성귀가 들어가면 호박죽, 콩나물죽, 방풍죽, 잣죽 등이 되고, 닭죽이나 전복죽은 주재료를 쌀죽에 넣은 것이다. 생선을 오래 끓여 낸 어죽과 우유를 넣은 타락죽도 별미로 유명하다.

지역적으로 나는 특산물로 죽을 쑤면 특별식이 된다. 부안 등 서해안 백합죽, 바지락죽과 동해안 섭(홍합)죽, 제주도 보말죽, 깅이(게)죽, 통영 빼때기(말린 고구마)죽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참치와 전복, 삼계닭죽 등 화려한 부재료와 잘 결합한 덕에 한국의 죽이 아시아계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끌며 ‘K-죽’시대를 열고 있다.

다른 나라의 죽 문화는 어떤가. 보편적으로 죽을 상식하는 중국에선 아침에 흰죽(저우·粥)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흰죽이나 콩죽을 묽게 쑤어 튀긴 빵 등을 넣어 먹는다. 현지 패스트푸드점에도 아침 메뉴에 죽이 포함될 정도다. 홍콩에도 멀끔한 흰죽부터 취두부를 넣은 죽, 피단(삭힌 오리알)을 으깨 넣어 간을 맞춘 죽, 훠투이(火腿)(중국식 햄)죽, 완자죽, 차슈죽 등 다양한 죽이 있다. 한국인보다 더 죽을 잘 먹는 일본인이지만 대개 멀건 흰죽(오카유·お粥)이나 달콤한 팥죽 위주라 화려한 한국의 죽을 보면 깜짝 놀란다.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 있고 곁들이는 반찬도 다양한 것에 찬사를 보낸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귀리로 끓인 오트밀(oatmeal)을 죽처럼 먹었다.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등 먹을거리가 부족한 곳이나 가난한 지역에서 먹던 음식이다. 같은 양의 곡물로 빵보다 더 많은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것이 오트밀이다. 지금이야 건강상의 이유로 오트밀을 먹지만 예전에는 죽(porridge) 자체를 가난의 상징처럼 여겼다.

기후와 토양이 척박한 러시아에선 당연히 카샤(Каша)를 주식으로 삼았다. 귀리를 비롯해 메밀, 호밀, 보리 등 잡곡에 우유와 버터, 돼지비계(라드) 등 동물성 지방을 넣어 열량을 보충했다. 느끼할 만큼 지방이 많이 들어 사골 곰탕이나 설렁탕 맛에 비견될 정도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선 스탈린 시대의 수용소 생활에 대한 묘사로 ‘멀건 카샤’가 등장한다. 우리네 ‘피죽’과 비슷한 표현이다.

죽을 끓이면 밥이나 면, 빵보다 곡식의 부피가 약 3배로 불어난다. 같은 쌀로 밥이 한 공기 나온다면 죽은 세 그릇이 생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죽은 그나마 유일한 조리법이었다. ‘아침에 밥을 먹고 저녁엔 죽을 먹는다’는 조반석죽(朝飯夕粥)은 그래서 나온 사자성어다. ‘피죽을 쑤어 먹을’이란 욕도, 허드레 음식을 넣은 ‘꿀꿀이죽’도 마찬가지 상황에서 나왔다.

죽은 경제적 효용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먹기 편하고 소화가 잘된다는 장점이 있다. 오래 씹지 않아도 되고 밥이나 국수보다 속이 편하다. 급할 때 한 끼를 해결하기에도 좋다. 요즘은 바쁜 현대 도시인들에게 속 편한 식사로 죽이 환영받고 있다. 맛있는 부재료를 넣고 빨리 뚝딱 해결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로 죽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부터 적은 양의 곡물을 쓰니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에 좋다. 요즘 많은 젊은 층이 빵 대신 ‘식은 죽 먹기’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는 이유다.

태곳적 인류가 가장 먼저 생각해 낸 요리 중 하나인 죽. 현대에도 영원한 인기를 누리는 죽은 역시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오래간다’는 교훈을 다시금 우리에게 주고 있다.

놀고먹기연구소장

어디서 맛볼까

◇무교삼계탕 = 닭죽을 판다. 삼계탕 육수라 인삼과 약재가 들었다. 찹쌀을 섞어 좀 더 부드럽게 넘어간다. 맛도 좋고 양도 꽤 된다. 속이 좋지 않거나 몸이 무거울 때 먹으면 진한 닭국물에 당장 기력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영혼의 닭고기 수프가 아닐 수 없다. 서울 중구 다동길 16 2층. 1만 원.

◇유화초 전복 = 해산물 넘쳐나기로 유명한 포항에서 전복죽으로 아성을 구축한 집. 언뜻 보기에도 진한 전복내장이 알알이 스민 죽을 판다. 한 술 떠넣으면 구수한 맛과 향이 입안에 퍼진다. 삶은 전복을 썰어 올려 씹는 재미도 좋다. 포항 북구 죽도시장2길 32. 1만5000원.

◇무주큰손식당 = 쏘가리 매운탕으로 유명한 집인데 어죽을 찾아오는 손님도 많다. 한 그릇 퍼 주는 게 아니고 전골냄비에 팔팔 끓여 내는 방식이다. 오래 고아 낸 잡어 육수에 채소와 밥을 넣고 한소끔 끓여 내면 비린 맛은커녕 싱그럽기까지 하다. 무주 무주읍 단천로 143. 7000원.

◇곰국시집 = 고깃국물로 국수를 파는 집. 전골국수를 주문하면 나중에 죽을 맛볼 수 있다. 육향 가득한 칼칼한 육수에 밥과 달걀, 다진 채소를 넣고 팔팔 끓여 낸다. 아무리 국수를 많이 먹었대도 ‘후식죽’을 먹어야 비로소 든든한 식사를 마치는 셈이다. 서울 중구 무교로 24. 1만8000원.

◇주마본 = 팥죽인데 후식이 아닌 식사로 파는 집이다. 달콤하고 고소한 팥죽 속에 새알심이 가득 들었다. 팥죽이 묻은 존득한 새알심에 매콤한 김치를 올려 함께 떠먹으면 허기를 당장 물리고 기분까지 좋아지는 묘한 매력의 죽이다. 전주 완산구 용머리로 36. 8000원.

◇좀녀네집 = 전복죽은 최소 30분 전에 미리 주문해야 맛볼 수 있다. 성게까지 넣었다. 바닷가 방파제 앞 간이 식당인데 주문을 받으면 그때부터 죽을 쑨다. 투박해 보이지만 바다 맛이 잔뜩 들었다. 소라와 문어 등 해산물도 곁들이면 더욱 맛이 난다. 제주 구좌읍 김녕리 6145. 1만1000원(1인분).

◇일통이반 = 보기 드문 보말죽을 판다. 그것도 씨알 굵은 왕보말이랜다. 표준어로 보말고둥은 제주에서 죽 재료로 많이 먹던 것인데 요즘 귀해서 좀처럼 접하기 어렵다. 다소 뻑뻑하게 쑨 죽에는 전복보다 진한 보말 특유의 향취가 제대로 들었다. 물김치와도 제법 어울린다. 제주 중앙로2길 25. 1만3000원.

◇청산어죽 =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 파주식 어죽이란 국수와 수제비, 밥 등을 모두 털어 넣고 오래 끓여 먹는 털레기(일명 천렵죽)를 말한다. 어죽을 인원수대로 주문하면 국수니 채소, 육수를 리필해 준다. 무주식보다 간은 살짝 싱겁지만 반찬과 곁들여 먹으면 된다. 파주시 돌곶이길 99.

◇금소리 갈미조개 = 개량조개인데 갈매기 부리를 닮았대서 갈미조개, 부산 명지 쪽에서 많이 난대서 명지조개라고 부른다. 선창에 갈미조개집이 모여 있다. 샤부샤부로 데쳐 먹다가 국물이 우러나면 밥과 채소를 넣고 죽을 쑤어 먹는다. 독특한 풍미가 밴 죽 한 그릇을 비워야 제대로다. 부산 강서구 르노삼성대로 602 선창회타운 내. 4만 원부터.

◇대흥식당 = 걸쭉한 국물의 어죽이다. 예당저수지라는 든든한 뒷배를 둔 집이라 관광객이며 주민들이 모두 찾는 집. 시원하면서도 고소하다. 별거 없는데 든든하기까지 하다. 밥알과 국수에서 나온 전분이 칼칼한 잡어 국물을 부드럽게 감싼다. 어죽답게 국수와 수제비도 들었다. 예산군 대흥면 노동길 14.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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