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노가리의 눈물

이태민 기자 2022. 5. 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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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1팀 이태민 기자

서울 중구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의 터줏대감 '을지OB베어'가 최근 문을 닫았다. 을지OB베어는 임대계약 연장을 놓고 건물주인 A호프 측이 제기한 명도소송에서 패소했고,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며 6번째 강제 집행 끝에 철거됐다.

이를 둘러싸고 법과 상도덕 사이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42년 노포(老鋪)'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역사·문화적 가치 보존을 위해 상생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 최초의 생맥줏집으로써 노맥(노가리+맥주)문화와 골목상권 형성 등에 기여했단 점에서다. 실제 서울시는 보존가치를 인정해 을지OB베어를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중소벤처기업부 역시 2018년 호프집 최초로 '백년가게'로 지정했다.

반면, 문화유산적 가치 보존을 이유로 법을 피해갈 순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임대시장은 자본 논리가 철저히 반영될 수밖에 없고, 그 근간은 '개인의 재산권'이란 점에서 건물주의 적법한 임대차 해지 통보라는 것이다. 명도소송 기간 동안 다른 상가를 알아보는 등 대안을 모색할 시간이 충분했단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간판이 뜯긴 채 스러진 을지OB베어 건물에서 대전 지역 근대건축물들을 겹쳐본다. 국가등록문화재인 근대건축물들은 훼손과 멸실을 반복하며 수난을 겪었고, 문화재로써 조명받지 못한 채 지자체와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잊혔다.

시의회는 근대문화유산의 공공 매입 필요성을 인정해 문화유산기금 조성을 위한 조례를 제정했지만, 해당 조례를 통해 지원받기 위한 미래유산은 아직까지 단 한 건도 지정되지 않았다. 대전시 역시 올해 대전관광공사를 출범, 근대건축물들을 환수해 랜드마크로 활용한다는 계획을 야심차게 내놨지만 정작 현재까지 예산편성, 위원회 구성 등 움직임은 전무한 상황이다. 이렇게 활용과 보존에 대한 논의가 수 년 째 지지부진한 데엔 건축물 상당수가 민간 소유인 탓에 매입 절차나 재원 확보 등에 어려움이 따른단 이유가 따라붙는다.

자본논리에서 건물주의 임대차 계약 해지로 세입자가 건물에서 내쫓기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하지만, 당장의 셈법에 역사를 되새겨 보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미래가치가 가려지는 것 같아 아쉽다. 서울 을지OB베어의 현주소에서 대전의 수많은 근대건축물들을 떠올리는 이유도 그러하다. 문화유산이나 백년가게 등으로 지정만 하는 것이 아닌, 보존가치를 지켜가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찾아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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