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타석 타격, 외눈 투구..실력만 있고 존중은 없던 순간들[슬로우볼]
[뉴스엔 안형준 기자]
야구는 존중의 스포츠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의 감성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야구는 '예의와 존중'을 불문율로 지키고 있는 스포츠다.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팀은 도루 등을 자제해야 하고 홈런을 친 선수도 지나치게 큰 세리머니를 할 경우 '빈볼'을 감수해야 한다. 소위 '꼰대 문화'의 전형처럼 보일 수도 있는 요소들이지만 야구의 역사는 그런 '존중의 문화' 위에서 작성돼왔다.
LA 에인절스가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구단 통산 12번째 노히터를 달성한 5월 11일(한국시간), 그런 존중의 문화가 무너지는 장면이 나왔다. 홈팀 에인절스가 10-0으로 리드한 8회말 공격이었다.
선발이 3이닝만에 무너진 뒤 4-7회 불펜 4명을 소모한 탬파베이는 우투좌타 외야수인 브렛 필립스를 8회 마운드에 올려보냈다. 8-0으로 뒤쳐진 상황에서 필립스가 등판한 것은 사실상 경기를 포기했다는 '항복 선언'이었다. 메이저리그는 2020년부터 바뀐 규정으로 6점차 이상, 연장승부 시에만 '투타겸업 선수'가 아닌 야수의 마운드 등판을 허용하고 있다.
필립스는 마이크 트라웃에게 2점포를 얻어맞았고 오타니 쇼헤이에게도 2루타를 내줬다. 그리고 10-0에서 이어진 앤서니 렌던의 타석. 우타자인 렌던은 우타석이 아닌 좌타석에 들어섰고 필립스가 던진 시속 54.2마일 공을 받아쳐 담장 너머로 날려보냈다. 이 홈런은 빅리그 데뷔 10년차인 렌던이 메이저리그 커리어 4,528타석을 모두 우타석에서 소화한 뒤 처음으로 들어선 좌타석, 처음으로 한 왼손 스윙에서 나왔다.
반응은 엇갈렸다. 에인절스의 홈경기였던 만큼 구장을 가득 채운 홈팬들은 당연히 환호했다. 생애 처음으로 좌타석에 선 베테랑 타자가 홈런을 친 진귀한 장면이었던 만큼 많은 현지 매체들은 이 홈런을 '진기록', '신기한 장면'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탬파베이는 반발했다. 탬파베이 구단은 공식 트위터에 "한 선수가 두 가지 방법으로 흥미롭게 플레이하는 것을 보는건 특별한 일이다. 에인절스 팬들이 지금 보는 것에 감사하기를 바란다"고 적으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탬파베이 측은 뒤늦게 논란 가능성을 의식한 듯 "필립스의 투수 등판에 대한 것"이라고 부연했지만 필립스의 익숙치 않은 '투타 겸업'을 에인절스 팬들이 감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는 분명 렌던의 플레이에 대한 불쾌함의 표시였다.
탬파베이가 불쾌함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크게 이기고 있는 쪽에서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고 기량이 부족한 선수들을 투입하는 일은 흔하지만 특별한 전략적 이유 없이 선수가 타석을 바꿔 서는 일은 없다. 렌던은 이미 우타자로 특급 커리어를 쌓은 선수. 이제와서 스위치히터로 전향을 생각할 이유도 없는 선수다.
크게 지고있는 팀이든 크게 이기고있는 팀이든 투수를 아끼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크게 지고있는 팀에서 더 이상의 '무의미한 투수 소모'를 줄이기 위해 야수를 등판시키는 것은 허용되지만 크게 이기고있는 팀에서 '어차피 이긴 경기니까 투수를 아끼자'는 의도로 야수를 등판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기 때문이다.
상황을 바꿔 생각하면 간단하다. 8회 타석이 10-0 리드가 아닌 1-1 접전 상황이었다면 과연 렌던이 상대 투수가 우완이라는 이유로 좌타석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접전 상황에서 렌던이 좌타석에 들어설 가능성은 '0에 수렴'도 아닌 '정확하게 0'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렌던이 좌타석에 들어선 것은 상대 야수의 등판까지 이끌어낸 상황에서 나온 '승자의 오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에인절스 조 매든 감독도 해당 장면이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다. MLB.com에 따르면 매든 감독은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루키 투수가 노히터 승리를 거둔 이날 경기에 대해 "훌륭한 영화 같았다. 야구는 이런 순간들을 원한다. 관중들의 함성이 이를 증명한다"면서도 "상대를 존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야구의 재미있는 순간이었을 뿐이다"고 덧붙였다. 편향적일 수 밖에 없는 홈팬들의 환호를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논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한 듯했다.
렌던의 좌타석 홈런을 보며 떠오른 선수와 장면이 있다. 지난해 스프링캠프 시범경기에서 김하성(SD)을 상대로 한쪽 눈을 감고 공을 던진 트레버 바우어(LAD)다. '괴짜'로 유명한 바우어는 당시 김하성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한쪽 눈을 감았다는 것을 과시하듯 자신의 눈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했다. 바우어는 직전시즌 사이영상을 수상한 최고의 '실력자'였지만 평소의 거침없는 언행들과 이어져 해당 장면은 여러가지 뒷이야기를 낳았다.
하지만 바우어는 어떤 일이든 시험해볼 수 있는 '연습경기' 성격의 시범경기에서 시도한 실험이라는 변명이라도 가능했다. 1회부터 눈을 감고 던진 만큼 승패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여유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바우어는 제구력 향상을 위해 한쪽 눈을 감고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해오기도 했다. 물론 타자들도 밸런스를 위해 반대 타석에서 타격 연습을 실시한다. 하지만 실제 정식 경기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일은 없다.
에인절스 지휘봉을 잡고있는 사람이 매든 감독이라는 점도 눈길이 가는 요소다. 매든 감독은 수많은 성과를 이룬 명장이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인품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매든 감독은 시카고 컵스를 지휘하던 2015년 크리스 코글란(당시 CHC)이 무리한 슬라이딩으로 강정호(당시 PIT)에게 큰 부상을 입히자 아무 문제없는 정상적인 플레이였다며 '사과할 필요는 없다', '족저근막염이 있다고 들었다'는 등 오히려 강정호를 조롱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내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코글란의 슬라이딩은 이후 포스트시즌에서 나온 체이스 어틀리(당시 LAD)의 슬라이딩과 함께 메이저리그가 무리한 슬라이딩을 금지하는 충돌 방지 규정을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일각에서는 최지만(TB)이 2020년 우타석에서 홈런을 친 것과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지만의 우타석 타격은 플래툰 시스템에 갇힌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시도한 스위치히터 도전이었고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리고 최지만은 팀이 뒤쳐진 6회 상황에서 추격 시작을 알리는 홈런을 친 것이었고 상대가 승부를 포기한 상황에서 여유있는 타격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천문학적 FA 계약을 따낸 렌던은 생존을 위해 변화를 꾀해야 하는 선수가 아니다.
매든 감독의 말처럼 렌던의 좌타석 타격은 그야말로 '한 순간의 재미'를 위해 백기를 든 상대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한 것에 불과했다. 바우어와 마찬가지로 오만이 낳은 무례였다. 루키 투수가 노히터를 달성하고 12-0 완승까지 거둔 에인절스에 실력은 있었지만 상대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자료사진=왼쪽부터 앤서니 렌던, 트레버 바우어)
뉴스엔 안형준 mark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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