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포스터에 갇힌 걸작 '씨받이'[무비줌인/손효주]

손효주 문화부 기자 2022. 5. 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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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고 강수연 씨가 ‘옥녀’로 출연한 영화 ‘씨받이’(1987년). 옥녀가 씨받이로 들어간 대갓집 방에서 부채로 더위를 식히는 장면.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손효주 문화부 기자
배우 고 강수연 씨의 대표작인 영화 ‘씨받이’를 오해해 왔다. 오해는 시간이 흘러 사실처럼 각인됐다. 해묵은 오해가 풀린 건 불과 며칠 전이다.

고인이 5일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야 그를 월드스타로 만든 ‘씨받이’를 제대로 봤다. 그는 열일곱 천방지축 ‘옥녀’로 나온다. 옥녀는 대갓집 종손 신상규(이구순)의 대를 잇기 위한 씨받이가 되고, 그와 사랑에 빠져 고초를 겪는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성애 영화’가 난립하던 1980년대에 나온 비슷한 유의 야한 영화로 여겼다. 1987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고인이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역사적 작품이라는 사실도 오래전 각인된 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진 못했다.

필자처럼 30대부터 40대 초반 중엔 ‘씨받이’를 지금도 에로영화로 아는 이들이 많다.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어른이 된 뒤에도 보지 않은 영향도 있다. ‘씨받이’를 오해하게 하고 볼 생각이 없게 만든 데는 포스터의 영향이 컸다.

1987년 개봉 당시 ‘씨받이’ 포스터는 여러 버전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건 고인이 소복 저고리를 풀어헤친 뒤 윗가슴 일부를 드러내고 앉아있는 버전. 드문드문 드러난 다리 맨살과 속이 비치는 얇은 소복, 뒷배경인 강렬한 빨간색의 조합은 한 장에 응축해낸 에로티시즘이었다.

1980, 90년대 미성년자였던 필자는 당시 비디오케이스에 인쇄된 글자 ‘씨받이’만 봐도 주춤했다. 거친 어감의 직설적인 제목과 야릇한 사진은 ‘어른 중에서도 진짜 어른만 보는 영화’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 포스터들은 상상력을 날뛰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급기야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본 ‘씨받이’는 한(恨)의 결정체였다. 영화를 관통하는 씨받이의 아픔을 그리는 과정에서 에로티시즘은 거들 뿐이다. 맥락 없는 성애 장면이나 노출은 없다. 당시 스무 살에 불과하던 고인이 “내 새끼 내 놓으라”며 몸부림치는 장면은 그가 왜 일찌감치 전설적 배우가 됐는지 알게 한다. 옥녀가 “난 새끼 낳아주는 짐승이 아니란 말이야”라며 절규하고 옥녀 모친(김형자)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이냐”며 한탄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여성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아픔을 직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임권택 감독은 파격적인 카메라 앵글로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을 담아내며 인습을 비판하고 인본주의를 강조한다.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당시 고인이 작품을 고르는 눈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영화의 부차적 요소인 야릇함만 담은 ‘낚시용 포스터’가 ‘씨받이’를 야한 영화 프레임에 가둬 버린 것. 포스터는 당시 한국 영화 체질 개선에 큰 역할을 한 이 영화에 대한 논의가 더 확장되지 못하게 한 장애물이 됐다.

오해를 부르는 포스터에 잠식당한 걸작은 비교적 최근에도 있었다. 영화 ‘끝까지 간다’(2014년)는 최근 넷플릭스가 프랑스판으로 리메이크 해 스트리밍 순위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끝까지 간다’는 이야기의 참신함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호평 받은 액션스릴러물. 2014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도 초청됐다. 그러나 포스터만 보면 경찰이 주인공인 뻔한 B급 액션코미디 영화 같다.

“증거가 다 있는데 왜 수사를 못 하게 하는 겁니까”라고 소리치는 ‘좌충우돌 열혈 형사’와 서장실에서 난을 닦으며 “위에서 안 된다고 하잖아”라고 말하는 서장이 떠오른다. ‘못 말리는’ 열정으로 권력형 범죄를 해결한 형사가 1계급 특진하며 윙크를 날리는 것으로 끝나는 클리셰 뒤범벅 영화가 연상되는 것이다.

‘김씨 표류기’ ‘지구를 지켜라’도 비슷하다. ‘김씨 표류기’는 해외에서 대학 영화 교재로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명작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사회 부조리를 만화 같은 엉뚱한 이야기를 통해 풍자한 걸작이다. 그러나 포스터는 웃음을 쥐어짜내려고 온갖 무리수를 두는 저예산 코미디 영화로 확신하게 만든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고인은 생전 한 방송에 출연해 ‘씨받이’가 에로영화로 치부되는 것에 대해 “이 영화를 찍을 때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슬프다고 생각했지…”라며 영화 개봉 직후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7일 고인이 별세한 뒤 20대 중에 그를 모르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씨받이’ 포스터를 본 적이 없는 이들도 많았다.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한편으론 다행인 듯도 하다. 영화의 메시지와 분위기를 함축해내기는커녕 애먼 부분만 부각한 ‘호객용 포스터’에 압도돼 영화를 보기도 전에 영화나 배우를 오해하는 일은 적어도 없을 테니 말이다.

손효주 문화부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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