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해관 문서에 담긴 '개항기 검역 역사'

김종목 기자 2022. 5. 1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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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근대 국제법 관례 따른 콜레라 검역 지침 등 수록
‘유네스코 회관’과 함께 문화재로

국가등록문화재 지정 예고 유산인 ‘해관 보고문서(인천, 부산, 원산)’는 개항기 콜레라 국내 유입 차단을 위한 예방 검역 지침 등 감염병 검역 업무 기록도 포함한다. ‘조선 인천의 콜레라 유입 방지를 위한 임시 장정(Corea Provisional Regulations for the Prevention of the Importation of Cholera)’의 한문 번역문인 ‘현의불허온역진항잠설장정(現議不許瘟疫進港暫設章程)’이 그 중 하나다. ‘瘟疫(온역)’은 ‘Cholera(콜레라)’ 번역어다.

당시 개항장 검역 역사는 진칭(중국 상하이교통대학 박사후연구원)이 대한의사학회 저널 ‘의사학’에 2020년 12월 발표한 ‘조선해관의 검역체계 구축과정과 감염병 해외유입에 대한 대응(1886∼1893)’에 자세히 나온다. 논문을 보면, 1886년 여름 일본에서 유입된 콜레라가 인천과 원산으로 확산됐다. 각 무역항 검역 규정이 없어 검역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일본은 해관이 아니라 영사관 주도로 검역을 주도했다.치외법권인 일본 조계 내 부산·원산의 부두·해관 검역 수행 협의를 위해 작성한 게 이 장정이다. 인천해관의 서리세무사 쇠니케가 1886년 7월 영어로 초안(‘7·14 초안’)을 만들어 영국, 청국, 일본 등 3국 인천 주재 대표에게 보내 승인을 받는다. 감리서와 통서 등 조선 정부 측에도 한문 번역문을 전달했다. 이 장정엔 ‘승선 검역’, ‘선내 콜레라 환자 처치’, ‘선원·승객 소독’, ‘선원 준수 사항’ 등을 담았다. 진칭은 “청국의 해관 검역 모델이었던 강해관의 검역 방식을 참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해관(海關)은 세관(稅關)의 중국식 표현이다.

이 초안은 독일 총영사 캠퍼먼의 승인을 받지 못해 수정을 거친다. 그 해 7월 30일 영국과 독일, 청나라와 일본 4개 국가가 승인한다. ‘7·14 초안’의 ‘(콜레라 환자를) 선박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다’는 문구가 ‘7·30 장정’에서 삭제됐다. 진칭은 “검역을 위해 격리된 선박의 선원·승객이 해관(세관) 의사의 조치에 대해 자국 외교관에게 항소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추가되는 등 인권 보호 차원에서 근대 국제법 관례에 적합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7·30 장정’은 ‘환자를 격리병원으로 이송하라’는 지침도 마련한다. 하지만 인천엔 1890년에 이르러 해관 부속 격리병원이 생긴다. 이 논문은 제중원 말고도 해관 부속 격리 병원이라는 근대식 병원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들 병원에서 활동한 의료인도 발굴한다.

‘7·30 장정’은 1987년 적용 대상을 ‘콜레라’에서 ‘감염병’으로 확대하는 등 한 차례 더 변경·추가된다.

문화재청이 문화재로 등록 예고‘해관 보고문서(인천, 부산, 원산)’는 1880~90년대 조선의 각 개항장에서 세관 업무를 관장한 인천해관, 부산해관, 원산해관이 중앙의 총 해관에 보고한 문서다. 항구 입출세 결산보고서, 항만 축조, 조계지 측량, 검역, 해관 행정(청사, 근태, 임금 등) 등 업무 사항에다 원산·인천해관 청사 도면도 담았다. 문화재청은 “개항기 각 해관에서 수행한 기본 업무와 해관마다 독특한 상황을 포함한 다채로운 내용이 들었다해관 초기 면모를 살펴볼 귀중한 자”라고 했다.

문화재청은 11일 ‘유네스코 회관’도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 1960년대 당시 현대 건축 기법이던 커튼월 공법(curtain wall, 강철로 이뤄진 기둥에 유리로 외벽을 세운 방식)을 적용했다. 문화재청은 건축물 원형을 유지하는 점을 평가했다. “교육, 과학, 문화 활동의 산실로 각종 국제회의와 학술토론회 등 국제 활동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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