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주머니 벽 쌓은 '키이우', 스산한 부활절·일상이 된 통금..사람들은 지하에서 40일을 견뎠다[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③]

글·사진 | 올렉산드르 구젠코, 번역·정리 | 정유미 빌런앤컴퍼니 대표 2022. 5. 11.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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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편집자 주> 올렉산드르 구젠코(28)에게서 우크라이나 현지 소식을 담은 세 번째 편지가 왔다. 전쟁이 벌어진 후 르비우에 주로 머물며 외신기자들의 취재를 돕고 있는 구젠코는 지난달 말 키이우, 이르핀, 부차를 방문했다. 러시아군의 침공 이후 치열한 전투와 학살 범죄가 벌어졌던 도시들이다.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도시의 현재 모습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지난 4월30일(현지시간) 촬영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에 있는 소도시 이르핀의 모습이다.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아파트, 상가 건물, 주택이 구겨진 종이상자처럼 처참하게 파괴돼 있다. 이르핀 | AP연합뉴스

키이우 시내 미카엘 대성당의 황금빛 돔 위로 따뜻한 4월의 태양이 반짝였다. 정교회 부활절 주일이었다. 우크라이나 전통 부활절 케이크 파스카, 알록달록한 부활 달걀 피산키와 같은 음식을 들고 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꽤나 북적였을 것이다.

미카엘 대성당의 생김새는 키이우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 같다. 소련시대의 건축가들이 전쟁 때 무거운 무기를 운반하기 위해 넓게 지었다던 거리는 거의 텅 비어 있다. 교차로마다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을 경계하는 검문소가 있다. 지하철역 출입구는 모래주머니들로, 정부기관의 출입구는 대형 콘크리트로 막혔다. 대도시의 시끌벅적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이다. 여전히 매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는 통행금지 시간이다.

키이우는 약 한 달간 이어진 포위전에서 살아남았다. 침략당한 도시에는 싸움, 파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차례차례 다가왔다. 도시 주민들은 개미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도시를 지키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요새가 건설되고 참호가 파였다. 무장한 군인, 경찰, 자원봉사자들이 각자의 위치에 섰다. 사회 취약계층은 방공호, 벙커, 지하철역으로 배치됐다. 흥미롭게도 키이우 지하철역들은 냉전 중 지어져, 핵 공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 사람들은 40일이 되도록 지하에서 살았고, 이따금 물이나 음식, 깨끗한 옷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땅 위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하실에서 자고, 먹고, 일했어요.” 지역 온라인 출판물의 편집장인 예브헤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브헤니는 한 달 동안 벙커에서 자고 일하며 보냈다. 예브헤니와 함께 지냈던 사람들 중에는 그가 일하던 사무실 바로 옆의 유명한 칵테일 바 ‘핑크 프로이트’의 주인, 직원, 단골손님들도 있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술집은 3일간 문을 닫았다. 하지만 후에 다시 문을 열었고, 지금은 경찰과 군인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차와 커피를 끓이는 수프 주방으로 쓰인다.

지난 월요일은 핑크 프로이트가 최신 칵테일을 판매하는, 본래의 역할을 처음 다시 맡은 날이었다. 우리는 모여 앉아 전쟁 후 키이우의 모습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전쟁 초반에 키이우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곳을 떠났다. 떠났던 주민들이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들이 알던 키이우는 이미 사라졌다. 러시아 군대의 위협도 여전하다. 치유되는 데 수년은 걸릴 상처다.

우크라이나 정부청사가 있는 키이우 번화가에 전장에서 옮겨온 러시아군의 확산탄도미사일이 꽂혀 있다. 전쟁을 상기시킬 목적으로 설치됐다.

■전쟁의 상흔 짙은 ‘이르핀’…“지구상의 지옥” 같았다는 ‘그날’ 지났지만 두려움·공포는 여전

주초에 이르핀과 부차를 연달아 방문했다. 전쟁의 상흔이 심하고 또 뚜렷한 지역이다. 이르핀은 키이우 서북쪽의 첫 번째 교외 지역이다. 고속도로를 따라 운전을 하다 보면 형언할 수 없는 파괴의 현장을 보게 된다.

개인 주택, 슈퍼마켓, 주유소 그리고 작은 상점들은 모두 러시아의 포탄 아래 종이구조물처럼 접혀져 있다. 어떤 곳은 창문이 무너졌다. 부분적으로 훼손된 곳, 포격을 받은 흔적이 처참한 곳, 불길에 휩싸였던 곳, 폭격을 맞아 무너지고 잔해로 뒤덮인 곳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도 피로 덮여 있는 곳도 있었다.

이르핀 시내를 방문했던 날,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농산물 직거래 시장이 열렸다. 계란, 고기, 야채, 꿀과 같은 농산물과 손전등, 테이프, 담요와 같은 기본적인 기구들이 있는 텐트가 펼쳐졌다. 사람들은 그 임시 텐트를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무표정하고, 말이 없고 위태로웠다. 사람들은 몇 주간 경험했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르핀이 경험한 폭력은 그 정도였다.

포격으로 아파트가 불에 탄 사람에게 손전등을 쥐여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날’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치유를 원하지 않는다. 오직 잊고만 싶어할 뿐이다. 대화를 시작한 지 2분 만에 노신사의 뺨에 눈물이 흘렀고, 그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어려웠다.

때로 나를 포함한 기자들은 관찰력에 기대야 한다.

취재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다 타버린 병력수송 장갑차 앞을 지나게 됐다. 전소되었어도 여전히 러시아 군용차량이 이 끔찍한 일(전쟁)을 시작할 때 새기는 ‘Z’ 기호와 ‘V’ 휘장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장갑차는 커다란 쓰레기통이 됐다. 마땅한 일이라고, 길 건너에 사는 한 여성이 농담하듯 말했다.

우리가 만난 취재원은 최신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디자인적으로 아름다웠지만, 집 안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점령 기간 동안 러시아군이 이 아파트에 머물렀다. 러시아 군대는 그가 소장하고 있던 술을 모두 마시고, 그의 아버지의 군사 훈장 몇 개를 훔쳤고, 집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들은 아파트에 머물 수 없었다. 부비트랩을 찾아 제거하는 특수 부대의 조사가 끝나야 했다. 이 집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지뢰가 발견되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목격자들은 점령 기간 동안 이르핀이 지상의 지옥 같았다고 했다. 포위된 후에도 수천명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르핀과 수도 키이우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위전 기간 동안 러시아군이 계속 진격하자 다리가 폭파되었다. 다리가 러시아군의 포격을 받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때를 기다리며 다리 밑에 갇혀 있었다. 결국 건너가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키이우나 그 외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돌아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영 이르핀과 작별을 고하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러시아군이 부차 점령 후 주둔했던 슈퍼마켓 바닥에 깨진 병과 음식물 포장재 쓰레기, 배설물 등이 널려 있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이 슈퍼마켓 창고에서 민간인을 고문, 살해했다.

■‘부차’의 파란 십자가…‘고문실’이 된 대형 슈퍼마켓, 아파트 단지엔 장례도 못 치른 딸의 얕은 무덤이

이르핀의 이야기는 러시아의 침공과 그 이후의 우크라이나 북부 점령에 대한 전체 이야기의 서막일 뿐이다. 넓게 펼쳐진 또 다른 교외 지역의 활기찼던 도시 부차의 이야기는 충분히 어두운 그림을 더 짙게 덧칠한다. 시내를 차로 지나가는 길에는 온전히 남아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잔해 더미, 파괴된 자동차, 거리의 유리 파편과 텅 빈 거리만 한때 이곳에서 번성했던 한 마을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리를 채운 건 죽음, 절망, 분노였다.

도시의 입구에는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된 대형 슈퍼마켓이 있다. 슈퍼마켓은 여러 발의 포탄에 맞았고 후에는 러시아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다. 나이 든 목격자는 “러시아인들은 대포를 주차하기 위해 슈퍼마켓의 주차장을 이용했어요. 여기서 시작한 공격으로 주변 마을들이 피격를 당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산산조각 난 슈퍼마켓 진열대를 따라 우리는 맥주, 와인, 샴페인, 그리고 러시아 군대가 사용했던 독한 술병으로 가득찬 창고로 들어갔다. 전쟁 전 계산원과 경영진이 사용했을 이 공간은 고문실로 변했다. 바닥에 널부러진 빈 병들, 파편 그리고 피, 배설물은 이 방에서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어떤 장면을 떠올리 건 어지럽고 괴로웠다. 이 방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중에 감금된 경험을 기록하거나 증언할 기회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취재원들은 입을 모았다.

우리는 또 다른 고문실을 찾아가기 위해 부차 시내의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향했다. 하얀 건물은 표면적으론 너무나 평온해 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에서도 하얀 벽과 황금 돔에서 뿜어 나오는 분노와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 뒤편 갈빛 진흙 아래엔 집단 무덤이 있었다. 불과 2주 만에 약 40구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대부분 민간인들이었다. 전범검찰청은 무덤에서 발굴된 시신 대부분이 총상을 입었으며 그중 일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결국 이들은 간접 사격으로 피살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표적이었다고 공표했다. 국제 형법에서는 이런 행위를 전쟁범죄로 분류한다.

성당에서 한 블록 떨어진 시립병원의 영안실로 자리를 옮겼다. 영안실은 부차와 인근 마을에 있는 지역사회로부터 보통 한 달에 10~20명의 사망자를 받는다. 4월에만 41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더 많은 사망자들에 대한 수색은 진행 중이다. 이 도시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부검과 필요한 등록 서류를 받는 기간 동안 시신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검은 봉지에 담겨 운반된 시신들은 밖에 배치된 두 개의 하얀 컨테이너에 보관된다. 이 시신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원 확인이 어렵다. 부검의와 자원봉사자 등은 시체 안치소에서 고인에 대한 모든 세부사항을 기록한다. 실종자를 찾는 사람들이 사무실에 남겨 놓은 성별, 나이, 키, 머리색, 옷 등의 정보와 이 기록이 일치할 경우 장례 절차를 진행하게 된다.

우리가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한 여자가 가방을 메고 남편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2021년 9월에 결혼했다. 그 곳에는 5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너무나 이상하리만치 적막해서 누구도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죽은 듯한 침묵을 깨는 건 검은 까마귀들의 울음 그리고 시체 수송차량임을 의미하는 코드명 ‘cargo 200’ 간판을 달고 옆을 지나가는 트럭들뿐이었다.

이 섬뜩한 광경 속에서 한 할머니가 누군가의 사진을 들고 나타났다. 기자들은 할머니를 에워쌌다. 할머니는 불필요하고 피비린내 나는 이 전쟁의 희생자가 된 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딸, 45세의 인나는 무차별 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모두 지하실에 숨어 있었지만, 인나는 사람들을 위해 물을 떠오려고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물가에 다다랐을 때, 근처에서 포탄이 터졌다. 인나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가장 최근에 머물렀던 아파트 단지와 쉼터 바로 옆에 묻혔다. 언제 사나운 폭격이 닥칠지 몰랐으므로, 정교회 전통을 따라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사치였다. 친척과 이웃들은 재빨리 얕은 무덤을 파고 작별을 고한 뒤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인나의 무덤에는 파란 십자가를 세웠다.

5층짜리 아파트 단지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탄약을 맞고 불길에 휩싸인 흔적이었다. 현장에 접근했을 때,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2층에 있던 이들 부부의 집은 벽, 천장, 바닥에 온통 그을음이 까맣게 꼈고 창문은 산산조각 났으며 사방이 잔해로 가득했다.

잔해 가운데 남은 귀중한 소지품들을 가지러 온 길이었다. 남은 물건은 비닐봉지 3개에 모두 담겼다. 이제 그들은 살 곳을 잃었다.

올렉산드르 구젠코

글·사진 | 올렉산드르 구젠코, 번역·정리 | 정유미 빌런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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