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모래의 붓질..자연이 그린 그림

글·사진(남양주)=조상인 미술전문기자 2022. 5. 1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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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캔버스를 자연에 놓았다.

강원도 홍천에서 제작된 작품 '자연하다'는 새빨간 바탕 위에 놓인 삭은 캔버스 조각이 금빛으로 느껴질 정도로 화려하다.

자연의 풍화작용을 캔버스에 담아낸다는 것이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는 아니다.

이를 두고 "하얀 캔버스는 귀뚜라미와 잠자리, 비와 구름과 바람의 놀이터가 됐다. 자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붓질을 했다"라며 신작의 근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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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타, 8년 만에 개인전
숲·사막·땅 속에 캔버스 놓아둬
풍화 작용으로 담아낸 작품들
모란미술관 재개관전 28점 전시
"견뎌낸 모든 이들에 바치는 경의"
강원도 인제 숲에 설치됐던 캔버스의 여름 모습. /사진제공=모란미술관
[서울경제]

새하얀 캔버스를 자연에 놓았다. 제주에서는 2년 동안 예닐곱 번의 태풍을 맞았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있던 2년 사이에는 물에 잠기기도 했다. 칠레 아타카마사막의 강하고 건조한 바람때문에 2년이 지난 캔버스 곳곳에는 모래가 박혀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는 절대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것을 자연이 그렸습니다.”

사진작가에서 개념미술가로 거듭난 김아타(66)가 첫 선을 보이는 신작 앞에서 입을 뗐다. 자신이 아닌 자연을 내세운 개인전 ‘자연하다(On Nature)’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미술관에서 19일부터 10월 10일까지 열린다. 2014년 이후 8년 만의 국내 개인전이다. 지난 2020년 개관 30주년을 맞은 모란미술관이 휴관한 채 진행한 리모델링 이후 처음 연 재개관전이기도 하다.

강원도 홍천의 땅속에 1년간 묻어뒀던 캔버스는 박테리아에 의해 갈갈이 찢기고 삭았다. 김아타는 이를 붉은 바탕위에 올렸고 '자연하다'는 제목을 붙였다.

강원도 홍천에서 제작된 작품 ‘자연하다’는 새빨간 바탕 위에 놓인 삭은 캔버스 조각이 금빛으로 느껴질 정도로 화려하다. 2011년 8월부터 딱 1년간 땅 속 3m 지점에 캔버스를 파묻어 두었다. 바람을 맞고 선 여타의 캔버스 작업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김 작가는 “땅 속 박테리아가 조각을 거들었다”면서 “캔버스 조각을 수습해 배열했더니 마치 죽었던 캔버스의 아름다운 부활처럼 보였고, 화려하게 살려내자 싶어 붉은 바탕에 얹었다”고 말했다.

김아타는 투명한 아크릴 상자 안에 벌거벗은 행위예술가를 넣어놓고 ‘인간문화재’라 칭하며 촬영한 ‘뮤지엄 프로젝트’, 8시간 이상의 장노출 기법으로 뉴욕 타임스퀘어부터 한국의 DMZ까지 찍어 바삐 움직이는 것들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멈췄거나 느린 것만 남게 한 ‘온에어’ 연작 등으로 명성을 쌓았다. 해외 유명 사진전문 출판사에서 사진집이 나왔고, 빌게이츠가 작품을 소장해 화제가 됐으며, 지금은 없어진 옛 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한 ‘인기작가’였다. 특히 12개 도시를 다니며 각 1만장씩 찍은 사진을 쌓고 겹쳐 형상은 사라지고 잿빛 색감만 남게 한 세기말의 풍경 같은 ‘인달라’ 시리즈는 반향이 컸다. 절정의 순간에 멈추기로 마음 먹은 작가는 은둔하며 이번 ‘자연하다’ 작업을 추진했다.

김아타
김아타의 '자연하다' 연작 중 연천 사격훈련장의 비산에 찢긴 캔버스 작품. 가죽 벗겨진 살덩이 혹은 핏빛 풍경으로 느껴진다.

자연의 풍화작용을 캔버스에 담아낸다는 것이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는 아니다. 김아타가 2019년에 쓴 책 ‘백정미학’에 따르면 1994년 1월 부산 근교 야산에 버려진 옛 마을회관을 작업실로 임대해 소나무 아래 캔버스 두 개를 세운 적이 있다. 이를 두고 “하얀 캔버스는 귀뚜라미와 잠자리, 비와 구름과 바람의 놀이터가 됐다. 자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붓질을 했다”라며 신작의 근원을 밝혔다.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작업이 쉽지 만은 않았다. “인간의 폭력성도 자연”이라는 생각에 추진한 경기도 연천 전방 군부대 사격 훈련장에서의 작업 계획은 하필 캔버스 설치를 하루 앞두고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1년 이상 미뤄졌다.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었다”고 말문을 연 김 작가는 “비산지역은 들어가는 것은 물론 근처에 가서도 안되는 곳이지만 ‘자연하다’의 연작은 포 작업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되짚었다. 아쉬움도 많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결국 허가를 받지 못했고, 우주가 그리게 하고자 나사(NASA)에 보내둔 요청도 답을 얻지 못했으며, 갠지스에 세워둔 캔버스는 홍수에 휩쓸려 가버렸다. 설치한 캔버스를 사람이 훔쳐간 적도 있다. 작가는 대범하게 이 모든 걸 아울러 “자연이 가져갔다”고 답했다. 28점의 작품들은 버티고 견딘 모두에게 바치는 헌사요, 경의다.

글·사진(남양주)=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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