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갈등 벗어나..새처럼 자유로운 예술혼 펼쳐

이한나 2022. 5. 1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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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1세대 한인화가 포킴展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연루
고국 등지고 뉴욕에 정착
동양적 붓질로 고통 승화
2006년작 `날아가는 새와 물고기`(182.88×152.4㎝). [사진 제공 = 학고재]
짙은 녹음 속 야자수가 화면을 가른다. 석양 무렵 같은 강렬한 하늘빛이 얇게 보색을 이루지만 미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맨 앞에 어정쩡하게 있는 회색빛 인간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처럼 노골적인 표정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넬 것만 같다.

뉴욕 1세대 한인 화가 포킴(김보현, 1917~2014)의 '야자수'(2001)라는 그림이다. 무표정한 회색 인간은 '일곱 개의 머리'(1997)에서는 인간 탑처럼 서서 불안한 정조를 강화시킨다.

2014년 97세로 타계한 포킴의 후기 작품 23점을 모은 개인전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가 학고재 본관에서 펼쳐졌다. 이념 대립의 고국에서 고통받고 미국에서 홀로 고투했던 선구자 화가를 재조명하는 기회다.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메이지대 법학과·태평양 미술학교를 거쳐 1946년 귀국한 뒤 조선대 예술학과를 창립해 첫 전임교수를 지냈다. 그러나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좌익으로 몰리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치하에서 친미반동분자로 고문당하는 등 정치적 고난을 겪으며 고국을 등졌다. 포킴은 생전에 "경찰에 쫓기는 끔찍한 꿈을 자주 꿨다"고 할 정도로 힘들어 했다.

그는 1955년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대 교환교수로 갔다가 1957년 귀국하지 않고 뉴욕에 정착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넥타이 공장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백화점 디스플레이, 집수리 등 부업을 하며 화업을 이어갔다. 특히 1960년대 현대미술의 중심지였던 뉴욕에서 빌럼 더코닝, 로버트 인디애나, 아그네스 마틴, 구사마 야요이 등과 교류하고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을 꾸준히 열었다. 1969년 조각가 실비아 월드와 결혼하며 발음하기 좋은 '포킴'이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고향을 떠난 이방인 화가는 새들을 키우며 위안을 찾았다. 특히 아끼던 앵무새 찰리가 태어난 후 그린 대형 회화 '파랑새'(1986~1988)는 회색조의 인간 군상 속에서 파란 새와 빨간 우산이 희망의 빛으로 읽힌다. '날아가는 새와 물고기'(2006)도 어둠을 품은 회색 선이 있지만 부유하는 새와 물고기가 자유로워졌고 '따스한 섬'(1998)과 '탑'(2000)에서는 밝은 오방색이 드러난다. 결국 그림에서나마 모국과 화해하고 낙원을 찾아간 것 같다.

2005년 본인이 거주하던 뉴욕 라파예트 빌딩에 '실비아 월드 앤드 포 킴 아트갤러리'를 열고 교수로 재직했던 조선대에도 작품 340점을 기증했다. 201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도 받았다.

전시는 6월 12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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