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해체 주역 우크라 초대 대통령 크라우츠크 별세

조기원 2022. 5. 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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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해체의 주역이며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기초를 쌓은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초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각) 별세했다.

우크라이나 집권당 '국민의 종'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인 크라우추크가 별세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고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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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침공]소련 종말 선언 벨라베슈 협정 서명
독립국 우크라이나 기초 쌓은 인물
레오니드 쿠라우추크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의 지난 2019년 때의 모습. AP 연합뉴스

소련 해체의 주역이며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기초를 쌓은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초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88.

우크라이나 집권당 ‘국민의 종’은 이날 소셜미디어에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인 크라우추크가 별세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 초대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고 추모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영상 메시지를 통해 크라우추크가 “단지 정치인 그리고 역사적 인물만이 아니었다. 항상 현명한 단어들을 찾아내, 모든 우크라이나인이 들을 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추모했다.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그는 우크라이나 독립선언법 통과를 이끌었다. 당시는 소련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가 실패하며, 소련 체제에 급격히 금이 가던 때였다. 석달 뒤인 그 해 12월 1일 이 법은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됐고, 그는 12월 5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흘 뒤인 12월 8일 벨라루스 벨로베슈스카야 숲의 소련 지도부 별장에 그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 벨라루스 최고회의 의장이 모여 소련의 종말과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에 합의했다. 슬라브 3국이 참여한 이 ‘벨라베슈 협정’으로 소련은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았다. 벨라베슈 협정에 서명했던 이들은 그를 마지막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련 해체 이후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았던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를 이끈 인물이었다. 그는 1993년 우크라이나에 있던 핵무기 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을 러시아에 넘기고 경제적 지원을 받기로 합의했다. 이듬해인 1994년 12월 5일 그의 후임자인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안전 보장과 경제 지원을 받는 대가로 핵탄두를 모두 러시아에 반환하는 내용의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각서와 달리 지난 2014년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하고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때문에 핵무기 포기를 그가 저지른 큰 실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반면, 신생 국가인 우크라이나가 당시 경제적 정치적으로 취약해 핵무기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당시에 예상하기도 어려웠다는 반론이 있다. 그는 86살이었던 지난 2020년 친러시아 반군이 일부 지역을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방 분쟁 해결을 위한 러시아와의 협상단 대표로 임명돼 잠시 정치 현장에 복귀했다. 지난해에는 심장 질환 관련 수술을 받았고 최근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고 <에이피>(AP) 통신은 전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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