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내가 살던 터전이 사라졌다[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3)]

글·사진|올렉산드르 구젠코, 번역·정리|정유미 빌런앤컴퍼니 대표 2022. 5. 1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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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편집자주>올렉산드르 구젠코에게서 우크라이나 현지 소식을 담은 세번째 편지가 왔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후 르비우에 주로 머물며 외신기자들의 취재를 돕고 있는 구젠코는 지난달 말 키이우, 이르핀, 부차를 방문했습니다. 러시아군의 침공 이후 치열한 전투와 학살 범죄가 벌어졌던 도시들입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지난달 초 북부 영토에서 러시아군이 물러간 이후 점령지에서 있었던 전쟁범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키이우의 한 거리 벽면에 우크라이나 국기 바탕에 “우크라이나인으로서 살아갈 만큼 충분히 용감하다”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다.


■전시 수도 키이우, 곳곳에 모래주머니벽

키이우 시내 미카엘 대성당의 황금빛 돔 위로 따뜻한 4월의 태양이 반짝였다. 정교회 부활절 주일이었다. 황량했다. 우크라이나 전통 부활절 케이크 파스카, 알록달록한 부활달걀 피산키와 같은 음식을 들고 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꽤나 북적였을 것이다.

전통대로라면 부활절 성찬예배가 끝난 후, 사제가 각 가정에 다가가 축복을 내리고 손님들과 그들의 음식 바구니에 성수를 뿌린다. 사람들은 그걸 보려고 이른 새벽부터 줄지어 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리곤 했다. 개인의 신앙심과는 별개로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부활절은 여전히 축제다. 선은 악을 이기고 부활에는 참을 수 없는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은은하게 상기시키기도 한다.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 성경 이야기에 현재 진행 중인 버거운 현실을 비춰보며 희망을 품는다.

미카엘 대성당의 생김새는 키이우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 같다. 소련시대의 건축가들이 전쟁 때 무거운 무기를 운반하기 위해 넓게 지었다던 거리는 텅 거의 비어 있다. 교차로마다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을 경계하는 검문소가 있다. 지하철역 출입구는 모래주머니들로, 정부기관의 출입구는 대형 콘크리트로 막혔다. 대도시의 시끌벅적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이다.

여전히 매일 오후 10시부터 새벽 5시는 통행금지 시간이다. 이 시간에 거리에 있다가 잡히면 잡혀서 심문을 받는다. 이전보다는 느슨해진 규정이다. 지난 3월 초 키이우 포위전 동안에는 통행금지가 36시간, 혹은 48시간 동안 발동되었었고, 이 규정을 어기면 발포 대상이 됐다. 이 조치로 도시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러시아 사보타주 공작원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키이우의 한 건물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방호벽이 세워져 있다. 모래주머니 방호벽은 10세기 키이우(키예프)공국의 통치자 올가 대공비의 석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올가 대공비는 공국 최초의 기독교인 군주이며, 남편 이고리1세를 살해한 드레블랴족과 전쟁을 일으켜 복수극에 성공한 인물이다. 이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역사적 인물이었던 올가 대공비의 일대기는 전쟁 이후 더욱 재조명받고 있다.


키이우는 약 한 달 간 이어진 포위전에서 살아남았다. 떠날 수 없건 떠나지 않건 한때 400만명이 살던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도시가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침략당한 도시에는 싸움, 파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차례차례 다가왔다. 도시 주민들은 새로운 상황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내 개미들이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도시를 지키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요새가 건설되고 참호가 파였다. 무장한 군인, 경찰, 자원봉사자들이 각자의 위치에 섰다. 사회 취약 계층은 방공호, 벙커, 지하철역으로 배치됐다. 흥미롭게도 키이우 지하철역들은 냉전 중 지어져, 핵 공격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 사람들은 40일이 되도록 지하에서 살았고, 이따금 물이나 음식, 깨끗한 옷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땅 위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하실에서 자고, 먹고, 일했어요.” 키예프의 중심에 있는 오래된 보헤미안 지역, 포딜을 살피는 동안, 우리는 지역 온라인 출판물의 편집장인 예브헤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브헤니는 한 달 동안 해리포터의 계단 밑 벽장과 맞먹는 크기의 벙커에서 자고 일하며 보냈다. 20여명의 다른 직원들이 그 벙커를 중심으로 일했다.

예브헤니와 함께 지냈던 사람들 중에는 그가 이전에 일하던 사무실 바로 옆의 유명한 칵테일 바 ‘핑크 프로이트’의 주인, 직원, 단골 손님들도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술집은 3일간 문을 닫았다. 하지만 후에 다시 문을 열었고, 지금은 경찰과 군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차와 커피를 끓이는 수프 주방으로 쓰인다. 술집은 재정 위기다. 코로나 시대와 전쟁을 모두 겪은 뒤라,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더라도 회복에는 수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크라이나 정부청사가 있는 키이우 번화가에 전장에서 옮겨진 러시아군의 확산탄도미사일이 꽂혀 있다. 전쟁을 상기시킬 목적으로 설치됐다.


지난 월요일은 핑크 프로이트가 최신 칵테일을 판매하는, 본래의 역할을 처음 다시 맡은 날이었다. 우리는 모여 앉아 전쟁 후 키이우의 모습을 대화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키예프가 공성전 이후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이해할지 포딜에 있는 어느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전쟁 초반에 키이우의 주민들은 대부분 떠났다. 그들은 도시에 스며드는 두려움과 불안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알던 키이우로 돌아가지만, 사실 그 키이우는 사라졌다. 그곳은 이제 전시 수도다. 대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이 도시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도시의 물자가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 교통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며, 무엇보다 키이우로 진군하는 러시아 군대의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치유되는데 수년은 걸릴 상처다.

끊어져 있는 키이우와 이르핀을 잇는 다리. 개전 초 러시아군의 진격을 늦출 목적으로 우크라이나군이 다리를 폭파했다. 일찍 탈출하지 못한 이르핀 주민들은 교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다리 아래 나무 널판지를 이용해 대피했다.


■이르핀 주민들에겐 여전한 그날의 악몽

주초에 이르핀과 부차를 연달아 방문했다. 전쟁의 상처의 흔적이 심하고 또 뚜렷한 지역이다. 이르핀은 키이우 서북쪽의 첫 번째 교외 지역이다. 고속도로를 따라 운전을 하다 보면 형언할 수 없는 파괴의 현장을 보게 된다. 개인 주택, 슈퍼마켓, 주유소 그리고 작은 상점들은 모두 러시아의 포탄 아래 종이구조물처럼 접혀져 있다. 어떤 곳은 창문이 무너졌다. 부분적으로 훼손된 곳, 포격을 받은 흔적이 처참한 곳, 불길에 휩싸였던 곳, 폭격을 맞아 무너지고 잔해로 뒤덮인 곳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직도 피로 덮여 있는 곳도 있었다.

이르핀 시내를 방문했던 날,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농산물 직거래 시장이 열렸다. 계란, 고기, 야채, 꿀과 같은 농산물과 손전등, 테이프, 담요와 같은 기본적인 기구들이 있는 텐트가 펼쳐졌다. 그런 시장이 처음 열렸다는 사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그 임시 텐트를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무표정하고, 말이 없고 위태로웠다. 사람들은 몇 주간 경험했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르핀이 경험한 폭력은 그 정도였다.

포격으로 아파트가 불에 탄 사람에게 손전등을 쥐어 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날’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그들이 본 잔혹행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을 때, 그들의 상처를 활짝 열어버릴 위험이 언제나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직 치유를 원하지 않는다. 오직 잊고만 싶어할 뿐이다. 대화를 시작한 지 2분 만에 노신사의 뺨에 눈물이 흘렀고, 그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건 어려웠다. 때로 나를 포함한 기자들은 관찰력에 기대야 한다.

이르핀의 한 폐차장에 전쟁 통에 파괴된 민간인들의 차량이 쌓여 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주택단지로 취재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다 타버린 병력수송장갑차(armored personnel carrier (APC)) 한 대를 지나게 됐다. 전소되었어도 여전히 러시아 군용 차량이 이 끔찍한 일(전쟁)을 시작할 때 새기는 ‘Z’ 기호와 ‘V’ 휘장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그 APC는 커다란 쓰레기통이 됐다. 마땅한 일이라고, 길 건너에 사는 한 여성이 농담하듯 말했다.

우리가 만난 취재원은 최신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디자인적으로 아름다웠지만, 집안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점령 기간 동안 러시아군이 이 아파트에 머물렀다. 러시아 군대는 그가 소장하고 있던 술을 모두 마시고, 그의 아버지의 군사 훈장 몇 개를 훔쳤고, 집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들은 아파트에 머물 수 없었다. 부비트랩을 찾아 제거하는 특수 부대의 조사가 끝나야했다. 이 집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지뢰가 발견되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목격자들은 점령 기간 동안 이르핀이 지상의 지옥 같았다고 했다. 포위된 후에도 수천명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르핀과 수도 키이우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위전 기간 동안 러시아군이 계속 진격하자 다리가 폭파되었다. 다리가 러시아군의 포격을 받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리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포격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건널 수 있는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며 몇 시간 동안 갇혀 있었던 것이다. 결국 건너가는데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키이우나 그외 다른 목적지로 향했다. 돌아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영 이르핀과 작별을 고하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러시아군 철군 이후 피난처로 사용되는 이르핀의 한 아파트 건물 놀이터 바깥에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 잔해 등이 쌓여 있다.

■부차의 아파트단지에서 본 파란 십자가

이르핀의 이야기는 러시아의 침공과 그 이후의 우크라이나 북부 점령에 대한 전체 이야기의 서막일 뿐이다. 넓게 펼쳐진 또 다른 교외지역의 활기찼던 도시 부차의 이야기는 충분히 어두운 그림을 더 짙게 덧칠한다. 시내를 차로 지나가는 길에는 온전히 남아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잔해 더미, 파괴된 자동차, 거리의 유리 파편과 텅 빈 거리만 한때 이곳에서 번성했던 한 마을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리를 채운 건 죽음, 절망, 분노였다.

도시의 입구에는 지금은 완전히 폐허가 된 대형 슈퍼마켓이 있다. 당시 슈퍼마켓의 보안 책임자였던 퇴역 군인이 입구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는 침공 첫 날 부차에 있었지만, 도망쳐야 살 수 있다는 판단을 빠르게 내렸다. 슈퍼마켓은 여러 발의 포탄에 맞았고 후에는 러시아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다. 나이 든 목격자는 “러시아인들은 대포를 주차하기 위해 슈퍼마켓의 주차장을 이용했어요. 여기서 시작한 공격으로 주변 마을들 피격 피해를 입은 겁니다.” 하고 말했다.

산산조각난 슈퍼마켓 진열대를 따라 우리는 맥주, 와인, 샴페인, 그리고 러시아 군대가 보관하고 사용하는 독한 술병으로 가득찬 창고로 들어갔다. 바로 부엌이 이어졌다. 전쟁 전 계산원과 경영진이 사용했을 이 공간은 고문실로 변했다. 바닥에 널부러진 빈 병들, 파편, 그리고 피, 배설물은 이 방에서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듯 했다. 어떤 장면을 떠올리건 어지럽고 괴로웠다. 이 방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중에 감금된 경험을 기록하거나 증언할 기회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취재원들은 입을 모았다.

러시아군이 부차 점령 후 주둔했던 슈퍼마켓 바닥이 깨진 병과 음식물 포장재 쓰레기, 배설물 등으로 어지럽혀져 있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러시아군 점령 기간 민간인들이 이 슈퍼마켓에서 고문, 살해당했다.


우리는 고문실을 찾아가기 위해 부차 시내의 성 안드리이 성당으로 향했다. 기념비적인 하얀 건물은 표면적으론 너무나 평온해 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에서도 하얀 벽과 황금 돔에서 뿜어 나오는 분노와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 뒤편 갈빛 진흙 아래엔 집단 무덤이 있었다. 불과 2주 만에 약 40구의 시신이 발굴되었다. 대부분 민간인들이었다. 전범검찰청은 무덤에서 발굴된 시신 대부분이 총상을 입었으며 그중 일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결국 이들은 간접 사격으로 피살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표적이었다고 공표했다. 국제 형법에서는 이런 행위를 전쟁 범죄로 분류한다.

성 안드리이 대성당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엔 시체안치소로도 쓰이는 시립병원이 있다. 영안실은 부차와 인근 마을에 있는 지역사회로부터 보통 한 달에 10-20명의 사망자를 받는다. 4월에만 41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더 많은 사망자들에 대한 수색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도시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부검과 필요한 등록 서류를 받는 기간 동안 시신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검은 봉지에 담겨 운반된 시신들은 밖에 배치된 두 개의 하얀 컨테이너에 보관된다. 이 시신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원확인이 어렵다. 사망 경위를 밝히기도 어렵다. 결국 정부기관이 나섰다. 현재 담당 직원 2명과 자원봉사자 2명이 있으며, 넷 중 가장 어린 사람은 22세다. 그들은 시체안치소에서 두 명의 부검의와 손잡고 고인에 대한 모든 필요한 세부 사항을 기록한다. 실종자를 찾는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성별, 나이, 키, 머리색, 옷 등 자신이 찾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남긴다. 이 정보와 일치하는 시신이 영안실로 옮겨져 이미 기록되어 있다면 다음 절차는 간단하다. 간단한 후속 서류작업과 장례 절차를 진행한다. 만약 기록된 바 없다면, 경찰과 수사관들은 트레일러의 검은 가방을 하나씩 수색하게 된다.

우리가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한 여자가 가방을 메고 남편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2021년 9월에 결혼했다. 그 장소에 모인 사람은 모두 50여명쯤 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이상하리만치 적막해서 누구도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검은 까마귀들의 울음, 그리고 시체 수송차량임을 의미하는 코드명 ‘cargo 200’ 번호판을 달고 지나가는 트럭들만이 죽음 같은 침묵을 깼다.

부차의 한 아파트단지 공터에 폭격으로 숨진 주민 인나(45)의 묘지임을 가리키는 파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 섬뜩한 광경 속에서 한 할머니가 누군가의 사진을 들고 나타났다. 기자들은 할머니를 에워쌌다. 할머니는 불필요하고 피비린내 나는 이 전쟁의 희생자가 된 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딸, 45세의 인나는 무차별 포격 때 목숨을 잃었다. 모두 지하실에 숨어있었지만, 인나는 사람들을 위해 물을 떠오려고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물가에 다다랐을 때, 근처에서 포탄이 터졌다. 인나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가장 최근에 머물렀던 아파트 단지와 쉼터 바로 옆에 묻혔다. 언제 사나운 폭격이 닥칠지 몰랐으므로, 정교회 전통을 따라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사치였다. 친척과 이웃들은 재빨리 얕은 무덤을 파고 작별을 고한 뒤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인나의 무덤에는 파란 십자가를 세웠다.

5층짜리 아파트 단지는 심하게 손상되어있었다. 탄약을 맞고 불길에 휩싸인 흔적이었다. 현장에 접근했을 때,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2층에 있던 이들 부부의 집은 벽, 천장, 바닥에 온통 그을음이었고 창문은 산산조각 났으며 사방이 잔해로 가득했다. 잔해 가운데 남은 귀중한 소지품들을 가지러 온 길이었다. 남은 물건은 비닐봉지 3개에 모두 담겼다. 이제 그들은 살 곳을 잃었다.

폭격으로 파괴된 부차의 한 아파트 건물의 내부 모습.
올렉산드르 구젠코

글·사진|올렉산드르 구젠코, 번역·정리|정유미 빌런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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