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전시 시대로 간 언니들의 '야동'.. 진화하는 제인 오스틴의 유산 [왓칭]

이태훈 기자 2022. 5. 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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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비영어시리즈 시청시간 역대 1위 '브리저튼'

넷플릭스 ‘브리저튼’ 시즌2 바로가기

/넷플릭스

“우리가 딸기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는 것은 딸기 치즈 케이크를 위한 미각을 진화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진화시킨 것은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한 맛으로부터 기쁨을, 견과류와 고기로부터 지방과 기름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을, 신선한 물로부터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는 회로들이다. 치즈 케이크에는 자연계의 어떤 것에도 존재하지 않는 감각적 충격이 풍부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뇌 속에 있는 쾌락 버튼을 누르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인공적으로 조합한 과다한 양의 유쾌한 자극들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 역시 또 하나의 즐거움 테크놀로지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동녘사이언스)

심리·언어학자 스티븐 핑커는 남성을 위한 포르노, 여성을 위한 로맨스 소설도 ‘쾌락 테크놀로지’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진화생물학자 장대익은 한 발 더 나아간다.

“포르노를 본 여성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지루하다는 것이다. 대신 짝 결속과 관련이 깊은 낭만이나 헌신이 들어있는 로맨스 작품에 빠져든다. 포르노 시장이 어마어마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로맨스 소설 시장이 그에 못지 않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진화심리학은 이런 놀라움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이다. 포르노와 로맨스 소설은 각각 남녀의 연애 본능의 부산물이다.” (’다윈의 정원’,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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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핑커의 말을 빌리자면,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2′는 ‘가장 맛있는 딸기 치즈 케이크’라 할 만하다.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창작된 ‘오만과 편견’같은 제인 오스틴 로맨스 소설의 가장 최신 버전이기도 하다. 동시에 남자들은 이해 못 하는, 오직 ‘언니’들만을 위한 ‘야동’이다.

첫 공개 뒤 28일 동안 6억 2711만 시청 시간을 기록(넷플릭스 주간 톱10 기준)하며 넷플릭스 영어 시리즈 최고 흥행작이 됐다. 2위는 6억 2549만 시청시간을 기록한 브리저튼 시즌1이었다. 이미 시즌4까지 제작이 확정됐다. 역대 전체 1위는 첫 28일간 16억5000만 시청시간을 기록한 비(非)영어 시리즈 ‘오징어게임’이다.

“그렇게 웃어주기만 하면 런던의 숙녀들은 쉽게 넘어가나 보죠?”(케이트 샤르마) “그래서, 내 미소가 멋진가요?”(앤서니 브리저튼)

‘브리저튼’엔 이런 대사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 이런 대화는 또 어떨까. “난 부족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대 앞에 날 낮추겠소. 당신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요. 그게 당신에게 청혼하는 이유요.”(앤서니 브리저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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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요약하면, 브리저튼2는 19세기 초 영국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한 브리저튼 가문의 장남 앤서니(조너선 베일리)와 케이트(사이먼 애셜리)의 사랑 이야기. 아름다운 고성(古城)의 저녁 파티, 드레스와 연미복 차림의 선남선녀, 차례로 청혼해 오는 준수한 남자들이 등장한다. 늘 있는 오해와 질투의 역경을 극복하면 아름다운 정원을 가로질러 신데렐라의 ‘호박마차’를 향해 우아하게 걸어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전형적인 귀족 로맨스다. 이 시리즈의 인기를 놓고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첫번째 인기 포인트는 ‘오만과 편견’같은 제인 오스틴 소설의 후계자임을 굳이 숨기지 않는 ‘리전시(Regencty·섭정) 시대’ 배경 로맨스라는 정체성. 영국에서 리전시 시대는 훗날 조지 4세가 되는 맏아들 왕자가 아버지 왕 대신 섭정 통치한 기간(1811~20년)을 가리키는 말. 새로운 예술적 경향이 움튼 문화적 황금기였고, 낭만적 연애에 대한 환상도 함께 꽃피었다. 현대 로맨스 시대극 계보는 1995년 BBC드라마 ‘오만과 편견’과 콜린 퍼스가 연기한 주인공 ‘미스터 다아시’의 폭발적 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 팬들에게 ‘브리저튼’은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리전시 시대 귀족 로맨스’의 적통인 셈이다.

또 다른 포인트는 백인 남녀의 전유물 같았던 귀족 로맨스의 한계를 깨부순 과감한 상상력이다. ‘브리저튼’은 영국 왕실에 유색 인종 혈통이 생겼다는 설정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피부색의 남녀를 등장시킨다. 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살짝 비틀고 다양성을 덧대어 확장하는 현대적 접근법이다. 흑인과 라티노 배우들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를 연기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이 깨뜨린 인종의 벽을 상업적으로 영리하게 활용한 셈이다. 스미소니언 매거진은 ‘브리저튼’을 “일종의 대체 역사 픽션”이라고 부르며 “백인이 아닌 다양한 인종의 시청자들이 ‘나도 저 이야기의 일부’라고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을 인기의 비결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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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고증 대신 현대적 여성상을 앞세운 것도 영리한 선택이었다. 리전시 시대는 분명한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 여성이 글을 읽고 쓰는 것조차 백안시됐다. 하지만 ‘브리저튼’에서 여성들은 책을 읽고 문학을 논하며 강하게 자기 신념을 주장하고 오히려 우유부단한 남자들을 리드한다. 치마를 입은 채 남자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는, 당대에는 불가능했을 모습도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브리저튼’은 친밀한 관계성을 원하는 여성의 연애 심리를 반영해 상업적 성공을 이끌어낸 가장 최신의 사례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브리저튼’은 ‘청소년 관람불가’ 성인물답게 고급스럽게 에로틱한 성애 묘사로도 큰 화제를 모았다. 가장 근본적 혹은 본능적인 인기 비결인 셈이다. 로맨스 소설을 ‘남성을 위한 포르노의 여성을 위한 대체물’로 보는 진화생물학의 시각이다.

스티븐 핑커는 말한다. “그 때 우리는 숨이 멎을 듯한 경치를 관람하고, 중요한 사람들과 허물없이 사귀고, 매혹적인 남녀들과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한다. 결코 손해보는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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