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당금 온도차]당국 "더 쌓아라" vs 은행 "지금도 충분"
은행들 충당금 쌓기 미온적.."이미 충분"
우리나라를 둘러싼 경제상황이 녹록지 않자 금융당국이 은행들에게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손실흡수능력'을 강화해 달라고 연이어 주문하고 있다. 대출 부실이 발생하더라도 이로 인한 충격이 금융회사를 넘어 국내 경제 전반으로 전이되는 상황을 사전에 방지하자는 차원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이에 대해 반응은 미지근한 편이다. 손실흡수능력을 의미하는 충당금 전입액은 코로나19 대유행 이전보다 줄이는 추세다. 금융당국과 은행들간 '손실흡수능력'에 대한 판단에 괴리가 느껴지는 모습이다.
당국 "은행, 돈 쌓아놔라"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3일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17개 시중은행장들과 만나 "은행들이 잠재 신용위험을 보수적으로 평가해 대손충당금을 충분히 쌓아야 한다"며 "자사주 매입, 배당 등은 충분한 손실흡수능력이 유지되는 범위내에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금감원은 은행이 대손충당금과 자본을 충분히 적립했는지 점검하고 손실흡수능력 제고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이는 비단 최근의 일도 아니다. 지난해부터 고승범 금융위원장과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경제 위기를 의미하는 '회색 코뿔소'와 '퍼펙트 스톰'등을 얘기하며 금융회사들에게 이같은 메시지를 연이어 보내왔다.
금융당국이 이같이 주문한 것은 최근 대내외 경제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전쟁으로 인한 고물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정책금리 인상으로 인한 고금리, 고환율 등이 본격적으로 가시화 되고 있다.
특히 국내 기업과 가계는 코로나19를 견뎌내기 위해 금융기관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자금을 융통한 상황이다. 올해 3월말까지 기업과 가계가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의 규모는 2152조원에 달한다.
은행 관계자는 "기업과 가계가 적극적으로 대출을 받은 상황에서 경제 여건 악화, 대출 금리 인상 등으로 인해 대출 이자에 대한 부담이 커질 수 있고 이로 인해 대출 부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금융당국은 보는 셈"이라며 "특히 은행이 이러한 부실을 감내하지 못할 경우 위기가 경제 전반으로 전이되기 때문에 금융회사가 선제적으로 나서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은행들 충당금 쌓기에 미온적인 이유
최근 은행들의 행보를 보면 금융당국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충당금 쌓기에 대해선 미온적이다. 올해 1분기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이 적립한 충당금 전입액은 3096억원이다. 지난해 분기별 충당금 전입액 평균 3494억원보다 400억원 가량 줄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했던 2020년 분기별 평균 6210억원의 절반 수준이다.
은행들은 이에 대해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부터 충당금을 충분히 쌓아둔 데다가 대출의 부실률도 낮은 상황에서 충당금을 대거 늘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은행 관계자는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당시 수천억원의 충당금을 쌓았고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통해 건전성 지표 역시 양호한 상황"이라며 "현재 건전성 지표와 미래 위기 상황들을 그룹(스테이지)별로 전망한 결과를 가지고 충당금을 쌓고 있으며 현재도 충분히 보수적으로 쌓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 1분기 기준 이들 은행은 평균 1조원이 넘는 금액을 충당금으로 쌓아놨다. 대출이 부실화 되더라도 이를 막을 실탄이 1조원 이상 준비돼 있다는 얘기다.
은행들은 단순히 충당금을 적게 쌓을 뿐만 아니라 벌어둔 돈도 적극 풀고 있다. 은행들의 모기업인 금융지주들이 적극적으로 주주친화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1분기 실적발표에서 신한금융지주와 하나금융지주는 1500억원의 자사주 소각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KB금융지주는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 15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배당성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분기별 배당에 나서는 등 주주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돈을 풀겠다고 한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금융지주들이 최대 순익을 기록하는 핵심계열사 은행들이 충당금 전입액을 늘릴 경우 실적이 감소하는 만큼 주가 방어를 위해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금리상승기는 은행계열 금융지주에게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며 "충당금을 적극적으로 쌓아 실적을 깎기보다 주주들에게 더 매력이 있는 회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주주가치 제고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경남 (lkn@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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