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더욱 절박해진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 운영'의 꿈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2022. 5.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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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일 대통령 집무실과 대통령실로 쓰일 옛 국방부 청사가 불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윤석열 정부가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를 외치면서 닻을 올렸다. 국내외의 정치·경제·안보 상황이 모두 절박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 거칠게 시작된 미‧중 패권 다툼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촉발된 세계 공급망 붕괴와 고물가‧고환률‧고금리의 삼중 악재가 전 세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국내 상황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다. 거대 야당의 입법 폭주 속에서 ‘공정과 상식’을 바로 세우는 일이 만만치 않다. 화려한 구호를 앞세운 공허한 정치적 선동으로 가능한 일이 절대 아니다. 실물경제의 성장과  식량‧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이 보장되지 않은 ‘도약’은 실현 불가능한 환상일 뿐이다.

창의‧파괴적 혁신을 통한 도약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새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를 내놓았다. ‘과학기술’이 무려 60회나 등장한다. 혁신(195)‧경제(139)‧환경(120)‧공정(101)‧시장(101)‧미래(95)‧청년(90)‧통합(73)‧복지(66)‧자율(64) 다음으로 잦은 빈도다. 새 정부가 합리적·비판적·창의적인 ‘과학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파괴적 혁신’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믿을 것은 오로지 ‘과학기술’뿐이다. 진정한 창의‧파괴적 혁신만이 진정으로 새로운 국민의 나라로 도약하는 길이다.

‘감염병 대응’(2)‧‘탈원전 폐지 및 원전 산업생태계 강화’(3)‧‘디지털플랫폼 정부 구현’(11)이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과학기술 과제다. 실물경제 살리기와 직결된 전략산업을 육성하는 산업부의 국정과제가 9개나 된다. 국가혁신을 선도하고, 초격차 전략기술 육성하고, 기초연구와 우주산업을 육성하고,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국정과제도 9개나 된다. 탄소중립의 주무부처인 환경부도 4개의 국정과제를 떠맡았다. 국방 분야 국정과제의 목표도 ‘과학기술 강군 육성’이다. 중기부‧복지부‧국토부‧해수부‧농식품부 등에도 과학기술과 관련된 국정과제가 잔뜩 들어있다.

절망적인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우리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고, 결국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도 우리를 이제는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인정해주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오로지 ‘과학기술입국’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마지막 불꽃을 피운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경제적으로 일본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이미대만이 우리를 추격해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과학기술 중심의 국정운영’은 여전히 유효한 미래지향적인 국가 운영 철학일 수밖에 없다.

지난 60여 년 동안 과학기술계가 이룩해놓은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인 원자력을 되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고작 1달러로 1주일을 살아내야 했던 우리가 1958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창설에 적극 참여하고, 237명의 국비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놀라운 결단이었다. 1978년 당시 전력 수요의 9%를 공급해주는 고리 1호기를 완공한 이후 40여 년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갖춘 원전을 독자적으로 설계‧건설‧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도 기적이었다.

탈원전의 폐지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원전의 평균 가동률을 끌어올리고, 장기적인 에너지‧전력수급 기본계획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원전 폐기물의 안전한 처분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모두가 원전 안전 가동의 안전판 역할을 해야 하는 원자력안전위원회도 해체 수준으로 개혁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라돈 침대 사태로 드러난 원안위의 민낯은 위험한 수준이었다. 원전의 안전 관리에 필요한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만 한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박아놓은 굵은 ‘대못’을 빼는 일이 만만치 않다.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을 감동시켜야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0시 서울 용산 대통령실 국가위기관리센터 상황실에서 국군통수권 이양 및 북한 군사동향 등의 보고를 받으며 집무를 시작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 세우겠다는 새 대통령의 호언장담에 과학기술계가 잔뜩 들떠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직접 챙기고,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정부 고위직에 중용해서 국정 전반에 과학적 사고와 데이터에 근거한 의사 결정 시스템을 정착시키겠다던 대선 후보의 약속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낙하산 인사로 과학기술을 함부로 흔들지 못하도록 만들고, 출연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물론 지난 20여 년 동안 과학기술을 국정의 중심에서 확실하게 밀어내버렸던 정치판의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순진하고 소박한 약속이었다. 그런 사실은 인수위가 출범하면서 분명하게 확인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 전문가를 자처하던 안철수 인수위원장도 어쩔 수가 없었다. 대선 막판의 단일화가 과학기술에는 오히려 독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제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직접 챙기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거대 야당이 0.73%의 패배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 현실에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나 과학기술부총리를 위한 행정조직 개편은 말도 꺼낼 수 없다. 마지막 순간에 과총을 비롯한 과학기술계가 간곡하게 요구했던 대통령실의 과학교육수석도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굳이 만들 때가 아니다’라는 당선인 비서실장의 차가운 한 마디로 정리가 돼버린 것이다. 새 정부에서 과학기술의 현주소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과학기술정부통신부 장관과 환경부 장관에 과학자들이 임명된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정체와 역할이 모두 불확실한 ‘민관합동위원회’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기부 장관은 반드시 전자공학을 비롯한 IT 분야의 전문가들이 맡아야 하는 이유가 도무지 석연치 않다. 특정 대학·학과 출신의 공학자들이 인수위와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틀어쥐어야만 하는지도 납득하기 어렵다. 대통령실의 과학기술 책임자가 반드시 여학생들의 롤 모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궁금하다.

 
기술 패권 경쟁과 초저성장의 위기에 빠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대통령이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원론적인 것이다. 이제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인식은 버려야 한다. 다양화‧다원화를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민주화된 과학기술 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공정과 상식’을 실천하는 가장 실질적인 수단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실과 국회를 움켜쥐고 있는 법률가 출신의 정치인들에게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해시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을 감동시키는 과학기술이 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5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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