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창 안 돌벽에서 피어난 민들레..민족의 경계 넘어 생명의 우주로
[경향신문]
김지하 선생은 말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한국 분단 뒤의 ‘산업화’를 추진한 박정희와 정면투쟁의 ‘40년 민주화’를 추진하며 늙어버린 미학 지향의 시인이다.” 필자는 그 말을 이렇게 옮긴다. “김지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생명 사상의 척후병이었다.”
가난했던 대한민국. 분단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독재가 칙칙한 장막을 세상 아래로 드리웠을 때, 그걸 찢으며 전면적인 근대화와 민주화를 요구하고 관철시킨 것은 4·19혁명이었다. 다음 해 5·16 세력이 경제 중심의 근대화를 내세우며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진행하자, 두 개의 정신은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접어들었다.
물론 정치의 장에서는 군사정권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4·19정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문화와 문학의 장소로 퇴각하여, 거기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방적 경제 주도와 그에 따른 천민자본주의적 심성의 확산을 공격하였다. 공격의 방법은 풍자와 비판과 감시, 성찰과 모색 그리고 각성으로의 초대였다. 김지하 선생은 그 싸움의 가장 날카로운 예각을 떠맡았다.
궁벽진 한자들을 톺아서 짐승의 형상을 뜨고 그 단어들로 권력자들의 전횡과 부패를 희롱하였다. 총칼만 알던 지배 세력은 언어의 위력에 놀라고 두려웠다. <오적(五賊)>으로 감옥을 보내더니, 날조된 이적단체의 주동자라는 혐의를 씌워 다시 투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과잉 조치는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선생의 석방 여부가 민주화의 기준이 되었으니, 김지하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깃발이며 신화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폭은 한없이 넓다. 민족이 고난에 처했을 땐 민족의 자주독립이 민주의 징표이고, 국민이 핍박을 받을 땐 자유와 평등이 민주주의의 목표가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지하 선생은 숨통을 죄는 철창 안의 돌벽에서 민들레가 피어나는 것을 보고 생명의 경이를 깨달았다.
선생이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한국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선생의 생각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생명의 우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 간극은 선생과 세상 사이에 치명적인 불화를 낳았다. 무구한 눈으로 보자면 생명은 민족과 민중의 확대라고 이해할 법하다. 그러나 각각의 용어가 요구하는 물리적 요건들은 사뭇 다르고 자주 충돌하였다. 생명 사상이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추기에는 동쪽 끝 분단국의 사정은 아주 각박하였다. 선생은 분별지(分別智)를 버릴 것을 주장하였으나, 세상에선 대립각을 세우는 게 습관이었다. 선생은 대동 세상을 원했지만 세상은 투쟁만이 살길이라는 주장으로 들끓었다.
선생은 삶의 그늘들을 보살피고자 했지만, 사람들은 햇빛 찬란한 땅들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변화를 만든다. 선생이 좀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정신적 유폐의 동굴 속으로 들쫓기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시나브로 달라져가고 있었다. 이제 한국은 제 한 몸 보신을 넘어 전 인류를 근심하고 배려하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으며, 사람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 중심의 사고로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다.
김지하사상의 외면당한 생각들이 비로소 재음미되고 재평가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선생의 몸은 바로 이 순간에 박동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생각과 언어들은 이제 인류 신사고의 찰진 질료들로 들어설 것이다. 선생은 ‘황토’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애린(愛隣)’의 시인이었다. 즉 “한많은 오백년”의 설움에 전 사람이자 동시에 삶의 애틋함을 그윽한 명상으로 반추하는 고독자였다. 또한 ‘오적’의 풍자가이면서 동시에 ‘화엄’의 도공이었다. 분열과 통일이, 공격과 화해가 같은 화구에서 나오는 기발한 대포의 발명가였다.
이 신비의 원천은 선생이 민족과 생명을 대립으로 보지 않고 지속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의 방식도 새 시대의 유산이 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잠든 자리는 결코 마르지 않는 깊은 샘일지라, 선생이시여, 그 안에서 줄탁의 숨결로 고운 꿈을 꾸소서.
정과리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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