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은행나무는 남녀의 사랑 상징해
'결혼·육아=행복' 인식 확산 위한
각계 목소리에 尹정부 귀 기울여야
지난가을 남산 기슭 도로변은 여느 해처럼 떨어진 은행들로 ‘지뢰밭’이 돼 있었다. 주말 오후 남자친구와 산책을 즐기던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앗, 나 방금 하나 밟은 것 같아.” “저런, 엄마가 아침에 차 빌려주며 세차한 지 얼마 안 됐으니 깨끗이 쓰라고 했는데.” “정말이야? 큰일났네.” 으깨진 은행이 묻은 신발을 신고 차에 타면 악취가 밸까 봐 살짝 걱정스러웠나 보다. 아들이 데이트를 한다고 선뜻 차를 내준 어머니가 설마 은행 냄새를 탓하랴. 사람 앞날은 모르는 것이지만 만약 저 커플이 결혼에까지 이른다면 가을마다 남산의 은행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들에게 은행나무는 남녀의 사랑을 상징한다. 식물로는 드물게 암수 구분이 있어서다. 민속학자들은 “수나무와 암나무가 마주보며 결실을 맺는 특성 때문에 우리 선조는 은행나무를 사랑의 징표로 여겼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에는 봄을 알리는 경칩이 되면 부부가 겨우내 소중히 보관해 온 은행을 꺼내 나눠 먹으며 서로의 무병장수를 빌었다. 경칩 당일 오후에 날이 저물면 미혼 남녀들은 한데 어울려 마을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 암나무와 수나무 주변을 맴돌았다.
세계일보는 올해 오피니언면을 개편하며 ‘인구와 미래’ 코너를 신설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최대 난제인 인구절벽 해법을 고민하고, 인구의 관점에서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해보자는 취지에서다. 이 분야 전문가인 이상림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이 우리나라 17개 시도 중 세종시 출산율이 가장 높은 이유를 짚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얼핏 ‘직장이 안정된 공무원이 많아서’라고 여길지 모르나 아니다. 정답은 ‘세종시에 신혼부부가 많아서’이다. 이 연구위원은 “신혼부부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우리나라 전체 출생아의 80% 이상”이라며 “신혼부부가 많을수록 출산아도 많아진다”고 설명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혼부부가 늘까. 솔직히 정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연애나 결혼은 국가 개입을 최소화해야 할 사적 영역이다. 그래서 시민단체와 교육계, 문화계, 특히 종교계의 역할이 절실하다. 핵심은 젊은이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결혼하면 행복해지고, 아이를 낳으면 더 행복해진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고언에 윤석열정부가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며칠 전 남산공원에 갔다가 등산로 입구의 단층 목조건물 상부에 지난가을 떨어진 은행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봤다. 공원 순찰 초소로 쓰이는 곳인데 주변 땅바닥이면 몰라도 지붕까지 청소할 여력은 안 됐나 보다. 사람들한테 밟히지 않아 냄새를 피우는 것도 아니니 치울 필요성을 못 느낀 듯하다. 어느새 봄의 끝자락이고 좀 있으면 여름인데 작년 가을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마침 근무자가 자리를 비워 텅 빈 초소의 열린 유리창을 통해 귀에 익은 1990년대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문득 그 위 지붕에 수북한 은행이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아름다워 보인다.
김태훈 오피니언담당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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