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단 이틀 동안 4만3천명이 학살당하다
역에서 마이다네크 수용소까지는 버스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수용소 터는 널따란 초원처럼 보였다. 1월 말이었는데, 지난해 묵은 갈색 잔디 옆으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소와 양을 방목해 키우는 여느 목장처럼 넉넉한 들녘의 모습에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끔찍했던 학살터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1943년 4월19일 나치 치하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강제격리지역)에서 유대인들이 봉기했다. 앞서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바르샤바에 유대인을 강제수용하는 게토를 만들었고, 게토에 과밀 수용된 유대인들은 식량과 물자 부족, 질병, 강제노동 등에 시달려야 했다. 1942년 유대인 말살 정책이 본격화하면서 게토의 유대인들이 절멸수용소로 이송돼 처형당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말살 소식이 들려오면서, 게토 안에 만들어진 유대인 전투조직들이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반부 주요 역사적 배경이기도 한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4주 만에 철저하게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1만명 넘는 유대인이 희생됐다.
폴란드 남부 루블린에 있던 폴란드 총독부의 나치 무장친위대(SS경찰) 본부는 또 다른 봉기가 일어날까 우려해 폴란드의 다른 게토들도 폐쇄하고,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의 유대인을 포함해 루블린 일대 유대인을 모조리 정리(학살)하는 계획을 세웠다. 작전명 암호는 ‘추수감사제’(Aktion Emtefest). 1943년 11월3일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에 있던 유대인 1만8400명이 총살되는 등 이튿날까지 루블린 지역 유대인 4만3000여명이 희생됐다. 당시 독일 나치가 일으킨 단일 학살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나치는 유대인은 물론 집시, 동성애자, 소련군 포로 등을 절멸시키기 위해 아우슈비츠, 소비보르, 트레블린카, 베우제츠, 헤움노, 마이다네크 등지에 절멸수용소를 세웠다. 절멸수용소 대부분이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 완전히 파괴돼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없지만, 아우슈비츠와 더불어 마이다네크 절멸 수용소는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수용 시설이 워낙 크기도 했지만, 연합군에 의해 접수·해방되기 1주일 전까지도 학살이 이뤄지고 있었기에 증거물을 파기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수용소 지휘관이던 안톤 테르네스의 무능 덕에 수용소 구조물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남쪽으로 기차로 2시간 걸려 루블린에 도착했다. 역에서 마이다네크 수용소까지는 버스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수용소 터는 널따란 초원처럼 보였다. 1월 말이었는데, 지난해 묵은 갈색 잔디 옆으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소와 양을 방목해 키우는 여느 목장처럼 넉넉한 들녘의 모습에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끔찍했던 학살터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마이다네크 수용소 박물관 쪽과는 여러차례 연락을 했다. 이곳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 희생자들의 신발(5만7천여점)을 좀더 가까이 접근해서 찍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박물관 쪽은 촬영 목적을 확인하고, 신분을 확인하는 서류와 여러 서약서 등을 요구했다. 나중에 도착해서야 알았지만, 촬영허가서를 받았더라도 일반 관람객보다 더 접근해서 찍거나 살펴보는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언론인이라고 해서 까다롭게 여러 서류를 요구한 것이다. 신발들은 굵은 철조망에 켜켜이, 빼곡히 넣어져 있어 바라보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2014년 11월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던 희생자의 신발 8점이 사라졌다. 누군가 철조망을 절단하고 훔쳐 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89년엔 수용소 화장터에서 수거한 희생자들의 유해가 사라지는가 하면, 2013년에는 전시 중이던 죄수 모자를 도난당했다. 유해는 끝내 회수되지 못했지만, 죄수 모자는 절도범이 인터넷을 통해 팔려다 미 연방수사국(FBI)에 적발돼 회수할 수 있었다.
애초 계획은 반나절 정도 머무르며 한참을 살펴보려고 했다. 점심으로 빵과 물도 넉넉하게 준비했고, 아우슈비츠처럼 두꺼운 유리에 갇혀 있는 신발들이 아니어서 가까이 볼 수 있을 것 같아 추가 조명 장비들도 준비해갔다. 하지만 일반 관람객보다 한발짝도 더 다가설 수 없는 상황에선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희생자들의 유해와 화장된 잿가루가 모셔져 있는 영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에서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홀로코스트 현장 순례단들을 만나게 되었다. 선대의 끔찍한 학살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유대계 대학생들은 화장터의 시신보관소였던 곳에서 손을 마주 잡고 빙 둘러섰다. 인솔자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잠시 유대인들의 종교의식을 올리려고 하니 사진 촬영을 멈추고 잠시 밖에서 기다려달라.”
그들에게 향했던 카메라 앵글을 접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화장터 처마 아래로 몸을 피했다. 드넓은 수용소 터는 소리 없이 쏟아져 내린 눈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질 않는 순백의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순례단의 흐느끼는 기도 소리가 창문 틈 사이로 흘러나와 귓속을 맴돌았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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