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근의 낮은 목소리] 나의 이중언어 생활 고백기
조형근 | 사회학자
“고향이 어디세요?” “부산입니다.” “어, 사투리 전혀 안 쓰시잖아요?” “쓸라카모 억수로 잘 쓰지예.” “아, 웃겨! 어릴 때 서울 올라오셨어요?” “아뇨, 고등학교 마치고 왔습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잘 못 고치던데, 서울말 배우느라 힘드셨겠어요.” “전 그냥 되던데요.”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수십년간 수백번 반복한 대화 패턴이다. 스무살에 서울로 유학 온 나는 며칠 만에 경상도 ‘사투리’를 버리고 서울 ‘표준말’을 썼다. 억양까지 싹 바꿨다. 지금까지 서울말을 쓴다. 물론 ‘상경’한 지방민이 서울말을 익히는 건 흔한 일이다. 그래야 비로소 ‘서울사람’이 된다. 문제는 내가 서울말 쓰는 걸 영혼의 타락쯤으로 여기는 경상도 남자에 속한다는 데 있었다.
동문회에 곧 소문이 났다. “형그이 서울말 쓴다 카대, 아 베리뿟다.” 버린 놈이 될 수는 없기에 잔머리를 굴려야 했다. 간혹 양쪽 눈치를 보다가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억양이 나오면 스스로 한심스러웠다. 시행착오 끝에 나름의 이중언어 전략이 생겼다. 첫째, 기본값은 서울말이다. 둘째, 경상도 사람과는 사투리를 쓴다. 서울말 쓰다가도 경상도 출신 화자와는 사투리로 말한다. 일관성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러려니 하게 된다. 수십년 이어온 내 입말의 이중생활이다.
왜 사투리를 버렸을까? 서울 와서야 경상도 남자 목소리가 그리 큰 줄 알았다. 물론 큰 목소리는 그냥 지역 특색이고, 유쾌하게 들릴 수도 있다. 수십년째 경상도 군인들이 독재를 하고, 경상도 사투리가 힘센 사람들의 표준말인 시대였다. 약자의 생존전략이랄까, 다른 지방이나 경상도 출신 여성은 서울말을 곧잘 배웠다. 서울말이 출신을 중화해주는 우산 노릇을 했을 것이다. 반면 서울 사는 경상도 남자의 호탕한 사투리에는 한번도 약자의 처지에 서본 적 없는 듯한, 주변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게 느꼈다. 내 입말이 딱 그랬다. 갑자기 내 혀가 혐오스러워졌다. 그길로 서울말로 바꿨다. 왜 경상도 사투리를 버렸냐고? 독재의 말투가 싫어서 그랬다. 사실이다.
사실인데 전부는 아니다. 결 다른 이야기가 좀 더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에서도 남쪽 끝, <파친코>의 선자가 나서 자라고, 바람 찬 흥남부두 떠난 피난민들이 떠밀려온 섬이다. 대여섯장씩 가마니를 받은 피난민들이 그 크기만큼 집을 지어 다닥다닥 살았다. 가파른 바닷가 벼랑에도 매달린 듯 살았다. 지금은 무슨 ‘문화마을’이 된 곳, 내 고향 동네다. 물질하는 이, 배 타는 이, 배 만드는 이, 배에 매달리는 이가 모여 살았다. 아버지도 배를 탔다.
아버지는 서울말을 썼다. 개성에서 태어나 마흔까지 서울 살았으니 당연했다. 팔도 사투리 사이에서 아버지의 조곤조곤 서울말이 좋았다. 아버지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당신의 실패로 자식들을 외진 데서 키운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럴 땐 아버지가 낯설었다. 어느 해인가, 마침내 서울로 간다는 것이었다. 동무들에게 떠난다고 말하니 슬픈데 또 설렜다. 형의 고등학교 ‘뺑뺑이’ 결과가 나오면서 없던 일이 됐다. 서울 전학 신청 뒤 대기하던 형이 지역 명문고에 배정됐다. 평준화 시대라 별일도 아닌데 부모님은 감격했다. 그렇게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몇년 뒤 내 입에서 술술 나온 서울말은 독재에 대한 반발이기 전에, 중심을 향한 아버지의 사무친 염원을 혓속에 몰래 물려받은 내 욕망의 발화였던 것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근대 국민국가의 탄생에 표준어는 필수요소였다. 전국적 단일시장의 형성, 그에 조응하는 의사소통 영역의 확장, 정치적 통합을 상징하는 장치로서 표준어는 필수였다. 대개 수도의 부르주아계급이 사용하던 방언이 표준어로 제도화됐다. 표준어가 통합의 상징이면서 차별의 기호인 이유다. 한반도에서는 1933년 조선어학회가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했다. 절대다수인 지방민, 노동자, 농민의 말은 “품위가 낮고 많이 변질된 말”이라며 배제됐다. ‘중류사회’에서 ‘교양 있는 사람’으로 규정은 바뀌었어도 그 본질은 여전하다. 표준어는 통합된 국민을 만드는 차별의 장치다. 그 이중성이 내 혀 위에서 두 개의 언어 습성으로, ‘분열된 아비투스’로 꼬여 있다.
서울말의 ‘매력’은 서울의 ‘위세’에서 비롯된다. 그 힘이 갈수록 아찔하다. 1949년 남한 인구의 20.7%였던 수도권 인구가 2019년 50%를 넘어섰다. 국내총생산의 절반 이상이 여기서 나오고, 50대 기업 본사의 92%가 몰려 있다. 명문대, 좋은 일자리, 문화 인프라가 갈수록 집중된다. 서울은 이제 대놓고 지방을 무시하고 모욕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통찰한 화제작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경제학자 폴 콜리어는, 번영하는 글로벌 대도시와 몰락하는 지방도시 사이의 지리적 분단을 첫째 문제로 꼽는다. 이 분단은 계급 분단과도 겹친다. 대도시의 세련된 고학력 엘리트와 몰락하는 지방 노동계급 사이 대립이 서구 정치의 주 전선이 됐다. 대도시 엘리트는 경쟁력 없어 보조금 받는다며 지방을 경멸하고, 분노한 노동계급은 포퓰리즘에 파멸적 연료를 공급한다. 어떻게 할까? 대도시 엘리트의 초과수익에 대한 과세를 주장하면서도, 지방에 보조금을 주는 재분배론적 접근법도 넘어서야 한다는 제언이다. 지방에 새로 산업을 구축하는 것이 요체라는 말이다. 걸러 들을 부분도 있지만 중요한 지적이다. 서울이 벌어 나눠주면 된다는 발상은 공화국 구성단위들 사이의 평등을 부정한다. 지속불가능하다. 돈보다 존엄이다. 지방마다 사정이 다르고, 저마다 문제도 있다. 그걸 빌미 삼아 지방을 가르고 낙인찍곤 한다. 지방에 ‘후진성’이 있다면 그건 서울의 ‘선진성’이 낳은 결과다. 함께 존엄해질 길을 찾자. 나처럼 혓속에 낙인을 감추고 사는 이들도 상처를 드러내고 촉구하자. 더 늦기 전에 방향을 돌리자고.
마흔에 부산에 온 아버지는 줄곧 서울말을 썼다. 바다 위에서 서울을 꿈꾸며 살았다. 배에서 내린 예순에야 부산에 진짜 상륙했던 것 같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다. 동네 자영업자가 된 아버지는 천천히 사투리를 익혔다. 단골 학생들에겐 “와 인자 왔노?” 하셨고, 이웃들에겐 “밥 한 끼 하입시더” 하셨다. ‘생활’하면서 ‘이야기’를 공유하는 지역민이 돼갔다. 38선 아래위로, 이 바다 저 항구로 떠돈 아버지 인생에 뿌리가 나고 자랐다. 그사이 아들의 혀는 서울을 욕망하며 꼬여갔다. 돌이켜보니 머리 굵으면서 아버지 앞에선 억양 센 사투리를 삼갔던 것 같다. 문득 선친께 ‘아부지예’ 하며 안부를 전하고 싶어진다. 내 입말의 상처를 벗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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