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턴하는 월가, 암호화폐 포용하려는 두 개의 시그널
[비트코인 AtoZ]
미국의 경제지 포천은 지난 4월 두 개의 뉴스를 통해 미국의 금융권이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에 대한 시각을 180도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하나는 피델리티가 미국인들의 퇴직연금인 401K(미국의 노동자 퇴직소득보장법 401조 K항에 규정돼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를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에 투자한다는 선언이었다.
또 하나는 골드만삭스가 비트코인 담보 대출을 시작한다는 뉴스다. 퇴직연금으로 암호화폐에 투자한다는 뉴스는 이전의 뉴스와는 다른 거대한 도약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피델리티 경영자가 시종일관 비트코인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가져 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기사 제목대로 미국 월가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 풍향계로서는 골드만삭스가 암호화폐의 담보 대출을 시작한다는 뉴스가 더 돋보인다.
갈지자 행보 이어 가던 골드만삭스
사실 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최대 투자은행(IB) 중 하나인 골드만삭스의 암호화폐에 대한 행보는 어지러운 갈지자의 전형이었다. 비트코인의 상승장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했던 경영자가 뻔뻔스럽게도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를 주시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비트코인 창구를 재개한다는 뉴스를 내보낸 지 얼마 안 돼 심혈을 기울인 연구 보고서를 통해 비트코인은 투자할 만한 자산이 아니라고 못 박으며 투자자들의 접근을 막아서기도 했었다.
그러다 결국 골드만삭스는 지난 3월 비트코인 장외 시장 거래(OTC) 창구를 만든다고 선언했다. 비트코이너들로서는 그간 골드만삭스의 갈지자 행보로 볼 때 큰 의미를 둘 만하지 않다는 조심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두 달이 안 돼 암호화폐 담보 대출을 시작한다고 선언한 것을 볼 때 OTC 프로젝트의 출범도 의미심장한 행보였다고 새롭게 평가할 필요성이 생겼다. 골드만삭스가 암호화폐 사업 참여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관계 당국의 의중을 떠보면서 단계를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델리티의 401K 투자 선언에 대해 바로 며칠 뒤 미국 동부의 고위 관료가 기금의 고갈을 우려한다며 반응했는데 골드만삭스의 암호화폐 OTC 프로젝트에 대해 관계 당국의 행정 관료나 정치권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더라면 두 달이 안 돼 비트코인 담보 대출 선언이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골드만삭스의 일련의 행보는 비트코인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미국 금융권 주류들의 그간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 주면서 동시에 사업적으로는 더 늦기 전에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어야만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만큼은 의견 차이가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골드만삭스의 담보 대출 뉴스 직후 ‘마지못해 암호화폐를 포용하는 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를 통해 신문은 미국 금융권이 비트코인을 좋은 사업거리로 보고 있으면서도 규제를 비롯한 다양한 위험 요소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왔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좋은 사업거리를 놓칠 수 없기 때문에 정부의 대응보다 앞서 나갈 수밖에 없다는 업계의 분위기를 전했다.
물론 여전히 규제 환경이 투명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은행들도 많지만 그 은행들도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금융계의 주류들이 몇 년 전처럼 한때 유행하다가 없어질 현상으로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시장을 냉소적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금융 기업들의 생존 법칙은 바로 ‘변신’
골드만삭스가 고객들을 장외에서 연결해 주는 OTC 창구를 운영하기로 한 것은 암호화폐 관련 파생 상품 시장으로 가기 위한 첫발일 뿐이라고 내부 관계자가 밝힌 바 있다. OTC 창구는 대량의 암호화폐를 거래할 때 그 행위 자체가 시장에 영향을 줘 좋지 못한 가격에 사거나 파는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이는 골드만삭스를 이용하는 초거대 부유층이나 기관투자가들처럼 큰손들이 비트코인을 거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놓아야 할 문제 중 하나다. OTC가 정착되고 커진다면 이는 거래소의 거래소 역할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즉 거래소가 고객의 자산을 일대일로 보관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규제가 완화된다면 거래소들은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거래소들 간의 시장도 활성화돼야 한다. 암호화폐 시장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이런 복잡하고 다층적인 시장이 필요한데 이런 거대 시장은 스타트업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대형 투자은행들이 노리는 시장은 바로 이런 특성을 갖는다. 대체로 위험이 낮고 수익은 안정적이지만 거대한 자본이 투입돼야만 한다.
2021년 봄 비트코인 가격이 고점을 향해 치달으며 열기가 뜨거웠을 때 미국의 포브스를 비롯한 미디어들은 JP모간이 비트코인 클리어링하우스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오기 몇 주 전 일본의 언론들은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가 미국의 주류 금융 기업 한두 회사와 합작으로 암호화폐 관련 미래 사업을 도모하고 있다는 첩보성 기사를 내보낸 바 있다. 몇 주 뒤 나온 포브스의 기사는 JP모간의 암호화폐를 위한 클리어링하우스 프로젝트 뒤에 손정의 회장이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클리어링하우스는 OTC 거래 시 대규모 매도자나 매수자가 적당한 거래 상대를 찾지 못했을 때 시장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유동성을 공급하는 사업을 의미한다. 가격의 변동에서 오는 위험을 잠시 떠안고 적당한 거래 상대를 찾을 때까지 현재의 시장 가격에 물건을 미리 사 주거나 팔아 주는 역할을 한다.
아마도 2021년 초여름 비트코인 가격이 고꾸라지지 않았으면 소프트뱅크와 JP모간 등 거대 자본의 합작으로 암호화폐 클리어링하우스 시장 계획이 등장했을지 모른다.
위험은 비교적 적지만 시장을 위한 시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과 함께 다량의 암호화폐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금융 기업은 직접 암호화폐를 구입하지 않고도 암호화폐를 확보할 수 있다.
고객의 암호화폐를 대신 보관해 주는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나 예치 서비스도 하나의 방법이다. 또한 암호화폐를 담보로 대출업을 할 경우 전당포라면 고객이 맡긴 담보를 그대로 창고에 보관하고 있어야 하지만 금융 기업은 이를 운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함께 풍부한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즉 골드만삭스가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담보 대출을 시작한다는 뉴스를 통해 시장을 위한 시장을 확보하려고 한다는 가설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거대 금융 기업들은 위험이 적지만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시장을 위한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고 이는 결국 암호화폐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 추론이 맞다면 늦은 감은 있지만 과감하기도 한 월가의 행보에 대해 규제 당국이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한 월가의 금융 기업들은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생태계의 성숙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의 최고위층 경영자들이 오리너구리와 같이 기존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이유로 비트코인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하곤 했지만 금융 기업을 100년 이상 살아남게 해 줬던 생존의 DNA 덕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결국 거대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해타산을 따라갈 것으로 보인다.
하물며 환경에 적응해야 할 미약한 개인으로서야 더 이상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나 알량한 옛날 학교 시절의 지식을 앞세워 엄연히 존재하는 새로운 기회를 부정할 여유가 있을 리 없지 않겠는가.
오태민 ‘비트코인은 강했다’, ‘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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