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윤석열 정부가 이어가야 할 세 가지
[세상읽기]
이원재 | LAB2050 대표
1914년 12월24일이었다. 팽팽하게 대치 중이던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맥주와 와인을 들고 슬금슬금 참호 밖으로 나왔다. 결국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수통에 술을 부어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함께 세웠다. 악명 높던 ‘참호전’을 잠시 멈춰 세웠던,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다.
긴 전선에서 대치 중이던 군인들은 2m 높이 좁은 참호 안에서 숙식과 용변을 해결하며 버티고 있었다. 참호 안은 벌레 떼와 쥐 떼가 돌아다니는 참혹한 환경이었다. 참호 위로 포탄이 날아다녔고,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총알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참호와 참호 사이 ‘무인지대’에는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대선 이후 우리나라 정치가 꼭 이 때의 참호전처럼 보인다. 두 진영이 참호 속 흙탕물에서 버티면서, 고개를 내밀면 가차 없이 총알 세례를 퍼붓는 전쟁 같다.
우리 정치에도 ‘크리스마스 휴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누군가 먼저 참호 밖으로 나와 통합을 외쳐야 한다. 과거의 정부와 현재의 정부가, 그리고 서로 다른 정당에 투표한 국민들이 함께 동의할 수 있는 정책을 찾고 집행해야 한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제 권력을 가진 윤석열 대통령이 먼저 나서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한 일 중 무엇을 이어가며 발전시킬 것인지를 찾아야 한다. 어떤 정책으로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을까? 이어져야 할 세 가지 대목이 있다.
첫째, 소득분배정책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최근 엄청난 악의 뿌리인 것처럼 비판받았다. 집권 초반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올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집권 기간 전체 최저임금 인상률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최저임금은 꾸준히 오르면서 대다수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을 높여왔다.
문재인 정부는 여기에 더해 근로장려금을 크게 늘려 저소득 노동자 가구를 지원했다. 또 고용보험 가입 대상을 늘려 보험설계사, 택배기사 등 특수고용직노동자도 가입하게 했다. 기초연금도 일부 금액을 올렸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가구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문재인 정부 내내 개선됐다.
윤석열 정부도 이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 국정과제에 유사한 내용이 여럿 들어 있다는 점은 반갑다. 하지만 좀 더 나아가서 최저임금의 완만한 인상 등을 검토해야 한다.
코로나19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경제는 계속 불안하다. 자칫 완화되던 소득불평등이 다시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이다.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분배정책을 준비해둬야 한다.
둘째, 성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이에스지(ESG) 정책이다. 환경·사회·지배구조 등 사회적 성과를 고려하는 기업이 경쟁력도 더 높아지는 시대다. 국제적 합의는 이미 이뤄진 상태다. 탄소국경세 같은 새로운 무역 장벽이 생겨나고 있고, 인명 사고를 일으킨 기업은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 정부 쪽에서는 공공기관 경영에 이에스지를 도입하고 있으며, 공적 연기금의 이에스지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 중 ‘지속가능한 성장’ 과제의 일환으로 환경 및 사회적 가치를 내세웠다. 방향을 이어가겠다는 이야기다. 다만 속도를 더 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국내총생산(GDP)을 대신해 환경 및 삶의 질을 포괄하는 대안적 경제지표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물질적 성장 일변도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가 구호에 그치면 곤란하다. 불평등과 기후위기 등 새로운 문제를 고려한 새로운 성장 모델을 찾고, 지디피를 대체하는 성장지표를 만들어 관리할 필요가 있다.
셋째, 지역균형발전 정책이다. 우리나라 부동산 문제는 ‘모두가 서울에서 집을 사고 싶어 하는’ 지역 격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문제에 아직 정답은 없지만, 최근 떠오른 의미 있는 화두는 있다. 부·울·경 메가시티는 ‘서울 이외의 다른 중심지역’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농어촌기본소득은 지역순환경제와 복지 혁신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지방소멸대응 특별양여금은 지역 주도의 상향식 해법 모색 과정을 제안한다. 이런 정책들은 윤석열 정부도 이어가며 정교화해야 한다.
‘참호전’에 몰두하다 보면, 참호 밖 국민은 멀고 아군만 가깝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병사들에게 맥주와 와인을 들려 참호 밖으로 내보낼 용기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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